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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락은 같은데!…
맥락은 같은데!…
  • 박태홍
  • 승인 2013.05.27 23:2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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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태홍 본사 회장
 빛의 고을 광주에 광주학생 운동과 5ㆍ18 민주화 운동이 있었다면 내 고장 진주에서는 진주 농민항쟁과 형평사 운동이 있었다. 시대적 차이와 목적은 각기 달라도 네 개의 사건 모두가 학생과 민초들의 애끓는 아우성이였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1929년 해방 전 일본순사들의 총칼 앞에 몸을 내던진 광주학생들의 독립운동은 이 나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도 남음이 있는 거룩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일본의 우민화 정책과 억압에 항거한 학생들의 항일의식이 전 국민에게 파급돼 해방을 앞당기는 계기가 된 것 아닌가 생각된다. 1980년 발발한 5ㆍ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광주사태, 광주폭동으로 묘사 되다 뒤늦게 민주화 운동으로 제자리를 찾은 전력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5ㆍ18은 반독재를 차단하기 위한 민중항쟁이였다는 것이 지난 정권의 사가들에 의한 결론인 것이다.

 10일 전 당시 희생한 고인들의 넋을 기리는 기념식도 가진 바 있다. 1862년(철종 13년) 진주에서 일어난 민란은 조선후기 봉건사회의 모순이 전면화 되는 시점이였다. 궁궐 내부의 세력 다툼으로 인한 붕당정치로 민심이 이반되는 원인이 되기도 했겠지만 결정적 원인은 조세의 기본이 되는 삼정(전정ㆍ군정ㆍ환곡)에 불만을 품은 세력들의 민중봉기로 보면 쉽게 이해가 된다. 그 당시 법으로 주동자들은 효수형에 처해진 가슴 아픈 시대적 비극이기도 하다.

 그러나 근세에 들어서는 당시의 진주민란을 공영방송에서도 취급한 조선최대의 민중혁명이였던 동학농민 혁명의 도화선이 된 것이 진주농민항쟁으로 손꼽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60여 년 후 1923년 진주에서는 또 한번의 민중들의 소용돌이가 있었다. 소를 잡아 생계를 유지하는 백정들의 신분 해방운동이 전개 된다. 이름하여 ‘형평사운동’ 고기를 달 때 사용하는 저울대의 이름 형평을 모태로 한 인권운동 단체를 결성하게 된다. 백정이라는 칭호는 고려시대에서는 평민을 가르키는 말 이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도살업을 전문으로 하는 천민계층을 뜻하는 것이였다. 1894년 갑오개혁 때 해방의인에 의해 법제상으로는 백정의 신분을 벗어났으나 실질적으로는 여전히 차별대우 받고 있었다. 그 당시 일제는 조선의 봉건적 질서를 온전하는 정책을 썼기 때문에 백정들은 행정적으로도 많은 차별을 받았었다. 이에 항거한 백정들의 아우성은 조직적인 사회운동으로 구체화됐다.

 지금으로 보면 백정들의 뜻있고 의미 있는 데모였다. 민적에 표시가 된다거나 복장을 달리해야 하는 등의 멸시된 관습을 바로 잡아야 하는 뜻이 담겨진 것이다. 강상호, 신현수, 천석구, 장지필, 이학찬 등으로 구성된 이들은 전국적인 규모의 모임을 경성하고자 한다. 그 당시 일본 본토에서 일어난 수평운동도 이들의 감성을 자극시켰다고도 볼 수 있다. 이들의 인권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된다. 그러나 내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편에서는 형평사 혁신동맹 창립총회를 열고 또 다른 세력은 형평사전국대회를 개최하는 등 내부분열이 인다. 형평운동을 사회주의 노선에 입각한 계급 해방운동으로 발전시키려는 세력과 그야말로 인권운동으로 유지시키려는 회원이 갈라지고 만다. 해방되기 전까지 진주에서 시작한 전국규모의 형평사운동은 인권운동의 모태라고 봐도 무방하다. 이럴진대 광주의 학생운동, 5ㆍ18, 진주의 농민항쟁, 형평사운동 모두가 맥을 같이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다만 시대적 배경이 다소 다르고 함축된 의미가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러나 광주의 학생운동, 5ㆍ18의 흔적들은 대단하다.

 하지만 내 고장 진주의 농민항쟁 형평사운동의 흔적은 농민항쟁 기념탑과 형평사운동의 조형물 하나만이 그날의 함성과 깊은 의미의 뜻을 대변할 뿐이다. 실로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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