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 명문 멋ㆍ맥 간직… 풍족한 명당 느껴져
500년 명문 멋ㆍ맥 간직… 풍족한 명당 느껴져
  • 김희덕 기자
  • 승인 2013.05.23 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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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의 고택을 거닐다 7] 창녕 서흥김씨 집성촌
1506년 휘 언상 자리잡아 골짜기 형상 ‘불밋골’ 불러
돌담길 따라 김희봉 기념비 ‘문화 요람’ 행동ㆍ영사재 보면
옛 선비 대하는 착각 들어

 예부터 명문거족(名門巨族)들은 자손의 번성과 재물을 넉넉하게 얻을 수 있는 곳에 터전을 마련하고 동족끼리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창녕도 예외는 아니며, 그 대표적인 동족마을이 서흥김씨 집성촌이다.

▲ 창녕 ‘서흥김씨 집성촌’ 전경
 창녕군 고암면 계상리(야동ㆍ계팔마을) 해발 548.4m 부흥산(富興山) 아래 500여년이 지나서도 지금까지 전통을 지키며, 살고 있는 서흥김씨(瑞興金氏) 동족마을이 마을 어귀부터 다르게 느껴진다. 왼쪽에는 마을표지석과 계팔 농암교(桂八 籠岩橋)표석과 오른쪽 물슬천(勿瑟川)변에는 농바위가 있어 마을의 수문장처럼 보인다.

 마을에 들어서면 고래등 같은 기와집의 고색창연한 모습에서 조선시대 어느 시골마을에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서기 1506년 이 고장에 새 터를 잡은 한훤당(寒暄堂) 김굉필 선생의 둘째 아들이면서 사헌부 감찰을 재임했던 언상(彦庠)이 입향(入鄕)했으며, 마을과 골짜기의 형상이 불미 즉, 불무와 같다해 불밋골이라 했는데, 한자로 야동(冶洞)이라 이름 한다. 입향조 이후 후손 중, 대곤(大坤), 치곤(致坤), 석희(錫熙)공 등 세분의 문과 급제자가 나왔다고 전한다.

 참봉 이남(二南), 야헌(冶軒) 만오(晩悟), 계은(桂隱) 공 등 학덕 높은 선비들이 배출됐으며, 온 고을의 칭송받는 효자 규철(奎喆)공 뿐 아니라 도덕과 문한이 끊이지 않고 있다.

 부흥산을 주산(主山)으로 팔봉(八峯)이 좌청룡(左靑龍)을 형성하며 내려온다고 해서 마을 이름을 계팔이라고 정했다. 8명의 대과급제가 난다고 전해지고 있다.

 마을 앞은 화왕산(火王山)과 열왕산(烈旺山) 사이에서 발류해 내려오는 물슬천이 휘돌아 내려오고, 마을 앞 농바위에 부딪혀서 물길이 마을을 향해 인사하듯 다가오고, 서쪽으로 흘러 우포늪(소벌)으로 접어든다. 풍수에 문외한인 사람들도 마을의 정경을 자세히 보기 위해 국도 20번 방골제에서 바라보면, 배산임수, 문전옥답이 펼쳐져 황금물결을 이루어 풍족한 마을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 계양서당
 마을 앞에서 물슬천 따라 서쪽으로 200여m 걸어가다 보면, 야동이라는 표석과 마을의 유래비 및 송덕비가 있고, 노송의 소나무 밑 길로 접어들면, 이 고장의 문화의 요람인 행동재(杏東齋)와 영사재(永思齋)가 있어 옛 선비들이 학문을 닦으며, 글 읽는 모습이 눈으로 보는 듯 느껴지고, 가뿐 숨을 쉬며 계단을 올라서 대청마루에 앉아보니, 앞산 박월산(薄月山)과 주변 경관이 한폭의 동양화 속에 신선이 된 듯 몸이 가벼워짐을 느끼게 된다.

 행동재는 은행나무 동쪽에 있는 제실이며, 430여 년된 보호수 은행나무를 한강 정구(鄭逑) 선생이 선조 13년 서기1580년 4월에 창녕 현감을 부임하신 후, 진외종숙(陳外從叔)이신 성재(惺齋) 김립(金立)선생을 틈틈이 문안 인사드렸을 때 심었다고 전해져 내려오며, 성인 4~5명이 안아야 되는 둘레 6.5m 높이 40m에 달하는 아주 큰 은행나무다. 긴 세월 두 분 선생의 도덕유풍을 담고, 우리와 함께 살아온 소중한 나무이다.

 은행나무는 예로부터 선비들이 학문을 연구하는 곳마다 주변 정원이나 마을 어귀에 즐겨 심었다. 왜냐하면 공자 선생께서 은행나무 아래서 제자들을 모아 학문을 가르쳤다고 해서, 공자처럼 학문을 닦아 훌륭한 사람이 되고자 그 의미를 되새겨 심고 있다. 이 마을은 다른 마을에서 보기 드물 정도로 많은 정자와 제각들이 존재하며, 대표적으로 행동재, 영사재, 계산재, 계양서당, 벽계정, 관수정, 계팔정 등이 있다.

 비화가야(非火加耶)시대에 만들어졌다고 전해져 내려오는 가야시대 저수지 제방이 170여 년 전에 폭우가 쏟아져 홍수가 났을 때, 급류에 휘말려 둑이 터져 허물어지고 일부만 남아 있어 옛 수리시설을 연구하는데 귀중한 유적지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마을 돌담길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애국지사인 간취(澗翠) 김희봉 선생 기념비와 안내문을 만나게 된다. 선생은 한훤당 선생의 15세손이며, 1875년 을해 생으로 효우독실(孝友篤實)한 유가의 후예다.

 일제강점을 못내 비통해 하는 중 1919년 거국적인 독립 운동을 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인우(隣友)이며, 문호(文豪)인 심재(深齋) 조긍섭(曺兢燮) 선생을 움직여 독립선언문 제작과 수천부 등사(謄寫)를 해 창녕 장날을 기해 살포하려다 일경에 발각ㆍ체포돼 공모한 심재 선생과 공산(恭山) 송준필(宋俊弼) 선생 등 동지들과 함께 대구 형무소에 수감됐다.

 삭발하려는 간수의 이발기기를 빼앗아 던지고 수의개복을 재촉하기에 “남의 강토를 강점한 너희가 도적이지 우리는 죄인이 아니다”라고 호통치는 기품은 우뢰 같은 목소리에 초범(超凡)한 여력과 무서운 안광등(眼光等)이 상대의 근접을 두렵게 하는 무장풍(武將風)이었다. 갖은 고초를 겪고 8개월 후 해옥(解獄)됐는데, 후유증으로 다년간 신고(辛苦)하다가 광복의 기쁨과 하청(河淸)의 금일(今日)을 보지 못한 채 1927년 12월 15일 53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하니, 많은 이의 애도를 더 했다.

 동족이던 당시 간수는 깊은 감명을 받고 사직 귀가해 수도인이 됐다고 전한다.

 묘는 계팔 백호등 계좌 선영 아래 공산선생의 묘갈찬(墓碣撰)이 있다. 2001년 대통령 표창을 추서 받고, 이 동영박사 찬으로 기념비를 세웠다.

▲ 벽계정
 전통을 이어가기가 쉽지 않은 요즈음 현 시대에 부모님에 대한 효를 더욱 더 계승 발전시키고 있는 곳 또한 이 마을의 아름다운 전통으로 계산(桂山) 김 휘 희달(熙達) 선생의 손자이신 김태인 옹께서 조부모님을 위해 계산 선생께서 후학들을 키웠던 계양서당을 건립하고, 조부의 탄신일을 기점으로 전국에 효자, 효부를 암암리에 조사해 표창과 상금을 내리며, 참석하신 손님에게 경객지도(敬客之道)를 다하는 칠첩반상을 독상으로 아름다운 미덕과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박월산 자락에 자리잡은 구니서원(求尼書院)은 한훤당 선생(1454년~1504년)의 둘째 아들 성제 김 휘 언상(彦庠) (1480년~1540년) 선생은 창녕군내 서흥김씨의 입창조(入昌祖)로, 무오사화(戊午士禍 - 연산4년 1498년)때 그 가족이 고암으로 피신했으며, 갑자사화(甲子士禍)로 한훤당 선생이 배소(配所)에서 죽고, 중종 반정(中宗反正 1506년) 후 고암으로 와서 그의 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다. 후손들이 조상을 받들기 위해 약 300년 전에 세운 것으로 묘각과 서당으로 사용하던 것을 1866년에 사헌부 감찰, 비안, 군위군수 등을 재임한 성재 선생과 감찰(監察) 립(立), 생원 수개(生員 壽愷), 찰방 수회(察訪 壽恢)를 비롯한 3대 4분의 위패를 모시고 서원으로 지었으나 1868년에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폐쇄됐다.

 지금의 강당은 1916년에 복원한 정면 6칸, 측면 2칸, 2익공계 팔작지붕집이다. 이 밖에도 경내는 사당, 동재, 서재, 문루, 관리사 등이 있다.

칠첩반상 : 7개의 접시로 차리는 상을 의미하며 육회, 물김치, 찜, 해삼, 나물, 김치, 자반 등으로 차려진다. 집안에 특별한 손님이 오면 독상으로 차려 대접하는 상차림이다. 수백년의 대를 이어온 칠첩반상은 어떤 경우에도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라는 경객지도의 정신과 전통이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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