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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슬픈 회상 <138>
제9화 슬픈 회상 <138>
  • 서휘산
  • 승인 2013.05.15 21: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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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슬픈 회상 (14)
그는 처녀를 쓸어안았다. 그 순간 풍만한 젖가슴의 보드라운 감촉과 함께 어떤 추억의 향기가 그의 코끝에서 잘게 흩어졌다.

 `빌어먹을 땡추 같으니……. 뭐? 남주의 혼이 수련에게 들어가?`

 그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에게 아내 이남주의 배신은 커다란 상처였다.

 따라서 더 이상 여자들을 믿고 싶지 않았다.

 `남주마저도 그러는데 하물며…….`

 이남주는 그의 가슴에 여자란 단지 악의 유혹이며 깊은 번뇌라는 몹쓸 망상을 남겨놓고 떠났다.

 통한 속에서 흘러가 버린 그 세월들…….

 어쩔 수 없이 지난날을 반추해보던 백지한이 고개를 들었다.

 어둠이 몰리기 시작하는 학교 앞은 학생들로 북적댔다. 그러나 수련은 헤아릴 수 없는 별들 가운데 교교히 떠있는 달과도 같은 존재였다. 비록 세월은 흘렀다 하지만 그도 수련도 서로를 금방 찾을 수 있었다.

 "아저씨!"

 눈이 마주친 처녀가 까만 머리를 흩날리며 달려왔다.

 백지한은 우뚝 서서 웃고 있었다. 처녀는 여전히 희고 청초했다. 그녀를 바라보는 그의 가슴에 3월의 바람 같은 청량감이 일었다.

 "이제 다 컸군……."

 아름답게 성숙한 아이의 모습에 그의 입이 절로 뇌까렸다.

 엎어질 듯이 달려온 처녀가 그의 품안으로 뛰어들었다. 품에 안긴 얼굴이 얼어 있었다. 그가 그 얼굴을 두 손으로 감쌌다.

 "많이 컸구나."

 남자의 말이 떨리고 있었다. 긴 눈썹 속에 가려진 처녀의 눈에선 하염없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말없이…….

 많은 젊은이들이 수군거리며 지나갔고, 이윽고 처녀가 눈물에 젖은 얼굴을 들었다.

 "보고싶었어예."

 "……."

 남자의 코가 시큰 울었다. 그는 처녀를 쓸어안았다. 그 순간 풍만한 젖가슴의 보드라운 감촉과 함께 어떤 추억의 향기가 그의 코끝에서 잘게 흩어졌다.

 농익은 여인의 향기…….

 지난 세월 내내 감방을 떠돌던 담요 냄새나 남자들의 동물적 냄새와는 확연히 다른, 또 어린 계집아이한테서 풍기는 풀내나 우유 내음과도 분명 다른…….

 잠시 정신이 어지러웠다. 그는 평정을 되찾으려 한 호흡 쉬고 처녀를 가슴에서 떼어 냈다.

 "어디 좀 들어가자. 춥다."

 "배고파예."

 처녀의 말에 응석이 섞여있어 남자는 머리를 끄덕였다.

 "뭘 먹을까?"

 "아저씨 드시고 싶은 거 많을 것 아입니꺼?"

 # `저 사람이 그 아저씨란 말인가?`

 수련을 몰래 쫓아온 전봉준의 머리가 묘한 기운으로 들끓기 시작했다. 아저씨라 하기에는 너무 젊어 보이고 연인으로 보기엔 나이가 많아 보인다. 그러나 자신에게는 결코 안 하던 수련의 저 절절한 애정표현…….

 호출을 받아 전화를 하고 돌아온 수련의 우수어린 눈에 그렁거리던 눈물. `아저씨가 돌아왔다!` 고 소리치던 그 목소리엔 기쁨이 가득했었다. 시합장엔 꼭 나가겠다고 약속하며 꽃도 챙기지 않은 채 서둘러 나가던 그녀의 활기 넘치던 몸짓…….

 그 모든 것들이 그의 가슴에 휑한 구멍을 뚫고 질투심을 심어놓고 있었다. 강력한 연적(戀敵)이 나타난 것이다.

 `저 남자에게 수련을 빼앗긴다면…….`

 그것은 시합에서 졌을 때의 그 아픔보다 훨씬 더한 절망과 패배감을 안겨줄 것이다. 전봉준의 가슴에 다시 불이 일었다. 차라리 천하장사를 포기할지언정 수련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 그 시간 경남지방경찰청 청장실이다. 나팔호가 수화기를 바꿔 귀에 댔다.

 "뭐? 벌써?"

 "예."

 "지금 어디에 있나?"

 "마산 경남대 앞입니다."

 나팔호는 담배를 꺼내어 입에 물었다. 그의 이마에 생땀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이 자식을 어떻게 하나?"

 사실 쉽게 체념하길 잘하는 백지한의 유순하고도 우유부단한 그 성격을 잘 아는 나팔호로서는, 그가 무궁사에 그대로 눌러앉을 것을 기대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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