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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슬픈 회상 <133>
제9화 슬픈 회상 <133>
  • 서휘산
  • 승인 2013.05.08 21: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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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슬픈 회상 (9)

“자네의 본분을 다하지 않는 이상 머릴 깎아줄 수 없네. 그리고 개나 소나 전부 중이 되려고 해봐.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

 백지한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곧 침묵을 깼다.

 “그래도 그 사람 말년은 행복했을 걸세.”

 “……?”

 “내가 주지 못한 권력도 맛보고 돈맛도 봤을 테니까.”

 “이 사람!”

 영봉이 눈을 부라렸다.

 “아내가 사랑했던 남잘세.”

 “이 사람이 점점!”

 영봉이 소리치며 눈을 다시 한 번 치떴으나 백지한은 개의치 않았다.

 “스님 심정 나도 알아. 그러나 더 이상 죽은 마누라의 이름을 더럽히고 싶지 않네.”

 “그것은 이름을 더럽히는 게 아니라, 원한을 없애주는 거라는 걸 왜 모르는가?”

 영봉이 답답해하자 백지한이 머리를 들었다.

 “알았어. 뭐라 해도 좋네. 그러니 더 이상 조용한 마음에 파문 일으키지 말고 제발 머리나 깎아 주게.”

 “난 자네가 자네의 본분을 다하지 않는 이상 머릴 깎아줄 수 없네. 그리고 개나 소나 전부 중이 되려고 해봐. 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내가 개나 소란 말인가?”

 백지한의 눈에도, 영봉의 눈에도 퍼런 불꽃이 튀었다.

 “그럼 처자식 죽인 놈 그대로 놔두고 머리 깎겠다는 놈이 개고 소지 사람이란 말이야?”

 “허어 이런…….”

 “……….”

 두 사람 사이에, 아궁이 속에 던져진 돌덩이 같은 침묵이 뜨겁게 깔리며 문밖의 박달나무는 그 잎을 밤바람에 흩날리기 시작했다.

 원래 무궁사는 비구니 묘현스님이 창건한 절이었다. 묘현은 보기 드문 여걸로 한국이 일본에 뒤지고 있는 이유를 불교에서 찾고 있었다. 이 나라의 불교계가 대승의 정법인 법화경을 버리고 소승의 방편법인 화엄경과 금강경에 치우쳐 국가의 기운이 쇠락하고 있다고 믿은 것이다. 그 믿음은 확고해서 그녀는 불교지도부에 이 신념을 강력히 주장했다. 그러나 무사안일 속에 빠져있던 보수적인 지도부는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묘현은 주지로 있던 진주 집현사를 떠나 이곳 천태산에다 무궁사를 창건했다.

 그것이 영봉이 집현사에서 고시 준비를 하던 사법고시 합격하기 전 해의 일이었고, 결국 그것이 인연이 되어 법복을 벗은 그가 무궁사를 찾게된 것이었다.

 묘현의 주장에 따르면 한국이 일본을 앞서가려면 첫째, 현재 소 의경전으로 삼고있는 금강경과 화엄경을 법화경으로 대체해야 한다는 것이었고 둘째, 참선을 통해 개인의 번뇌해탈보다는 치열한 기도와 염불을 통한 조직의 번성기원으로 수행방법을 바꿔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거센 파도가 몰아치고 있는 국가현실을 외면한 채, 그 속박과 번뇌, 생사의 고뇌에서 벗어나 자기만의 자유와, 안락과 해탈을 위해 참선하고 있는 것이 과연 부처님의 뜻이겠어?… 아니야. 결코 아니야. 석존께서도 현실의 무수한 파도와 싸운 끝에 깨달음을 드실 수 있었잖아?”

 영봉은 피가 끓던 그 대학 시절, 비장한 표정으로 설법하곤 하던 묘현스님에게 절절히 공감했었다.

 “맞습니다 스님. 결국 이 사회와 중생에 대한 끝없는 사랑만이 깨달음의 기초이며, 수행의 가장 중요한 토대라고 할 수 있겠군요.”

 창건주 묘현의 영향은 영봉에게 거의 절대적이어서, 그는 지금도 철저한 현실참여에 의해서만이 깨달음에 들 수 있다고 강하게 믿고 있었다. 따라서 주어진 현실을 자꾸만 외면하려고 하는 백지한에게는, 그 영봉이 차갑고도 드높은 태산준령의 암벽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 백지한이 울상이 되어가고 있는 그 순간, 경남지방경찰청장 나팔호는 자신의 청장실에서 그의 하수인인 작두의 전화를 받고 있다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안한 기색이 역력하다.

 성미가 급한 작두가 기다리지 못하고 목소리를 깔았다.

 “지금 처치할까요?”

 “아니다. 좀 더 두고 봐라.”

 “지금이 기회라고 봅니다.”

 “이 자식이…….”

 “……….”

 “이무가기 용이 되려면 천년이 걸려 임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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