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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슬픈 회상 <129>
제9화 슬픈 회상 <129>
  • 서휘산
  • 승인 2013.05.01 22:1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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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슬픈 회상 (5)
잠시 후 그들이 주지실에 들어섰을 때에는 무언가 해동의 색채가 방안을 점령하고 있었다. 계곡이 녹아 흘러내리는 상쾌한 계류.

 법당 안은 여전했다. 불상은 없었고 천부경과 법화경을 비롯한 불경만이 빼곡히 모셔져 있다. 백지한은 향을 피우고 삼배를 올린 뒤 법당을 나왔다. 문을 열던 그의 시선이 한 곳으로 빨려갔다.

 “……!”

 영봉이 법당 밖에서 그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서 있는 것이다.

 “왔는가!”

 소리치는 그 얼굴이 반가운 백지한은 대답 없이 계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영봉의 거룩한 손을 뜨겁게 움켜쥐었다.

 “…….”

 “…….”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터질 듯이 웃고 있었다. 그 광경을 소식을 듣고 몰려온 절 내 대중들이 숨을 죽이고 지켜보았다. 이윽고 영봉이 입을 열었다.

 “들어가세.”

 잠시 후 그들이 주지실에 들어섰을 때에는 무언가 해동의 색채가 방안을 점령하고 있었다. 계곡이 녹아 흘러내리는 상쾌한 계류…….

 끓는 질창기 속에서 넘쳐나는 향기는 춥고도 기나긴 겨울을 뚫고 파릇이 솟는 봄새싹 같은 내음이었다. 그 파릇한 향기에 진한 향수를 느낀 백지한이 영봉을 바라보았다.

 “무슨 향인가?”

 “민들레.”

 영봉이 짧게 대답했고, 백지한이 확인했다.

 “민들레?”

 “그래.”

 영봉이 잠시 뭔가 추억에 잠긴 듯한 표정이 되었다가 말을 이었다.

 “자넬 생각하면 항상 이 민들레가 떠올라서 말이야.”

 “……!”

 “인동의 세월을 보내고 있을 나의 친구가….”

 “그래서 미리 준비했단 말인가?”

 “…….”

 영봉은 대답 대신 흐뭇한 미소를 지었고, 감격한 백지한은 그 눈시울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영봉은 오늘 자신이 올 걸 미리 알고 이런 간단한 준비 속에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백지한의 감동을 뚫고 영봉이 손바닥을 폈다.

 “자, 앉게나.”

 “그려.”

 마주앉은 그들 사이에 잠시 정감 어린 침묵이 흘렀다. 진한 민들레, 그 인동의 향을 풍겨내는 물 끓는 소리만 그들의 숨소리를 삭이고 있었다. 이윽고 영봉이 빙그레 웃으며 정적을 깼다.

 “자넨 더욱 젊어졌군.”

 “고맙네.”

 백지한은 부정하지 않고 흔쾌히 화답했다.

 “스님은 부처님의 풍모가 더욱 풍기네.”

 “이 사람 큰일 날 소리.”

 “아 부처님보고 부처님이라 하는데 큰일 날 소리라니?”

 “그만 하게 이 사람.”

 영봉은 손을 젓고 그 손을 질탕기로 가져갔다. 그리고 익숙한 솜씨로 잔을 채운 뒤 백지한 앞으로 옮겨주며 나직이 물었다.

 “그래 인제 어떻게 할건가?”

 백지한은 차 한 모금을 음미한 뒤 부드러운 미소를 담고 영봉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의 입술을 떠난 목소리는 담담했다.

 “머리를 깎아주게.”

 순간 영봉이 놀랐다.

 “뭐라?!”

 그리고 못들은 사람처럼 고개를 앞으로 깊숙이 내밀었다.

 “지금 뭐라 했는가?”

 백지한은 침착하게, 그리고 또렷이 확인해 주었다.

 “머리를 깎아달라 했네.”

 영봉이 고개를 가로 저으며 그 답지 않게 실소했다.

 “허-, 이 사람…….”

 그러나 백지한은 그 비웃음에 대응하지 않고 잔잔히 미소지을 뿐이다.

 “난 이제 그 어느 것에도 집착함 없이 넓고 크게 살고 싶네.”

 순간 영봉의 두 눈이 백지한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그 눈빛이 유월의 댓잎처럼 청청하다.

 “굳이 중이 되고자 하는 것도 집착이 아니던가?”

 허를 찔린 백지한이 움찔, 현기증을 느꼈으나 곧 평정을 되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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