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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슬픈 회상 <128>
제9화 슬픈 회상 <128>
  • 서휘산
  • 승인 2013.04.30 2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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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화 슬픈 회상 (4)
“지금 대구에서 삼랑진표를 샀다는 연락을 받았소. 그놈이 만약 앙심을 풀지 않았다면 우린 끝장이오.”

 “예? 무슨 일인데…….”

 “백련이 오늘 출감했소.”

 “예?!”

 나팔호의 가슴이 오그라들었다. 백련이란 백지한을 말하는 것이다. 갑자기 목이 타오른 그는 마른침을 삼킨 뒤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입니까?”

 “그래. 지금 대구에서 삼랑진표를 샀다는 연락을 받았소.”

 “…….”

 “그래서 말인데…….”

 “예, 말씀하십시오. 차장님.”

 나팔호가 침을 삼켰다.

 “그놈이 만약 앙심을 풀지 않았다면 우린 끝장이오.”

 “저도 우려하고 있는 밥니다.”

 이윽고 정일육이 명령하듯 물었다.

 “몇 명이나 동원할 수 있어요?”

 “한 이십 명.”

 나팔호가 엉겁결에 대답하고 목소리를 깔았다.

 “죽이는 겁니까?”

 “알아서.”

 “알겠습니다.”

 휴대폰을 접은 나팔호는 담배를 꺼내 지긋이 물었다. 그는 오늘 같은 백지한의 출감일에 대비해 준비를 갖추어왔고, 각오도 단단히 하고 있었으나 막상 그가 출감했다고 하니 오금이 저리는 것이다.

 불을 붙인 그는 연기를 길게 빨아들였다.

 ‘어떻게 할까?’

 담배는 환각에도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며 가슴은 더욱 불안감으로 타올랐다.

 ‘놈은 필시 날이 선 복수의 칼을 가슴에 품고 있겠지?’

 ‘아니야. 그 유악한 놈은 벌써 나를 잊었는지도 몰라.’

 한참을 이렇게도 생각해 보고 저렇게도 생각해본 끝에 나팔호는 모종의 비장한 결심을 하고 휴대폰을 열었다.

 “작두냐?”

 “예, 접니다. 청장님.”

 “잘 들어라.

 ”# 6척에서 약간 모자라는 백지한의 몸은 탄탄했다. 마흔네 살, 그러나 그의 피부는 열 살은 젊어 보이고 발걸음에도 힘이 있었다. 오늘 감옥에서 나온 티라곤 어디에도 없다. 대신 인내로 달구어진 그 눈동자엔 관조와 고즈넉함이 엿보인다.

 지나간 세상일을 잊은 그가 쉬엄쉬엄 걷기도 하고 버스와 열차를 번갈아 탄 끝에 삼랑진 천태산에 도착한 것은, 석양이 산꼭대기 나뭇가지에 걸려 노을을 그려내는 저녁 무렵이었다.

 박달나무 향기가 바람결에 풍기는 천태산 소롯길엔 낙엽이 하나 둘 구르고 있다. 탱강거리는 풍경소리가 들리자 그는 문득 걸음을 멈추고 길이 끝나는 고갯마루를 올려다보았다. 저만치 저무는 가을녘에 산사의 기왓장이 석양으로 빛나고 있었다. 바로 무궁사인 것이다.

 ‘스님은 잘 있겠지?… 고마운 사람.’

 즐겁게 웃음 짓는 백지한의 눈매가 맑았다.

 ‘이제 저곳에서 내 생을 묻으리.’

 그의 가슴이 설레어왔고, 그는 다시 절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일주문에 걸린 현판 ‘천태산무궁사’와 ‘무궁사경노대학’.

 그 낯익은 글씨마저 정겨웠다.

 무궁사의 당우들은 특이하다. 천태산에서 나온 토착 암석으로 형식에 치우진 현란함을 피한 대신, 소박하면서도 무게 있게 지은 것이다.

 백지한이 역시 온통 바위로만 지은 천왕문으로 들어서자 어디선가 낙엽 쓰는 듯한 소리가 바스락 바스락 들려왔다. 정감 어린 그 소리를 들으며 사천왕에게 일일이 합장하고 막 큰법당으로 향할 때였다.

 요사채 앞에서 싸리비로 은행잎을 쓸고있던 청년 스님 하나가 고개를 돌리고 이어 허리를 곧추 세웠다.

 “아니? 백거사님!”

 “오! 해운스님, 잘 계셨습니까?”

 손을 절로 합장하며 백지한이 다가갔다.

 “그간 고생많으셨지예?”

 해운이 커다랗고 선한 눈에 금방 눈물을 담고 손을 잡았다.

 “고생은 뭐……. 자 얘기는 부처님이나 친견한 후에 하입시다.”

 “예, 거사님.”

 해운의 손을 놓은 백지한은 큰법당으로 갔고 해운은 주지실로 날 듯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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