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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영웅의 귀환 <121>
제8화 영웅의 귀환 <121>
  • 서휘산
  • 승인 2013.04.21 22: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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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화 그리운 세월 (9)
허공을 바라보다 민들레, 그 그윽한 향기를 들이키는 영봉의 두 눈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세월이 흐르고 바깥의 세상이 하루하루 변해가도 수련의 몫은 오로지 기다림이었다. 그녀의 온몸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백지한에 대한 그리움이 더욱 두터워지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한바탕 웃음과 함께 연극이 끝나고 사회자가 다음 행사를 알렸다. 축하행사로 이 학교 출신의 프로선수들과 재학생 씨름부원들간의 친선 씨름경기를 체육관에서 한다는 내용이었다. 안내자의 말끝과 동시에 수련이 일어섰고 그녀의 호출기가 울었다.

 가방에서 호출기를 꺼내 보내온 전화번호를 확인하고 있는 수련에게 함께 있던 오희라가 물었다.

 “누구니?”

 “글쎄……. 모르는 전화번혼데.”

 수련이 고개를 자웃 하자 오희라는 쉽게 말했다.

 “전화해봐.”

 “그래야겠어.”

 공중전화부스로 간 수련은 수화기를 들고 카드를 넣었다. 그리고 보내온 전화번호를 눌렀다. 신호음이 가고 곧 저편에서 중년여성의 응답이 왔다.

 “예, 찻집, 도투마립니더.”

 “찻집예?”

 “예, 그런데예.”

 “호출하신 분 좀 부탁드릴까예?”

 “잠깐만 기다리시소.”

 잠시 후, ‘전화 바꿨습니다’ 하고 수화기를 타고 온 목소리는 뜻밖에도 영봉이었다. 수련이 놀라 소리쳤다.

 “스님!”

 “그래. 나다.”

 입학식 때 왔던 영봉이 수련을 찾아 학교에 온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창원 천선동에 개창한 성불사의 법요식에 참석했다가 시간이 나서 들렀다는 것이었다. 수련이 부랴부랴 도투마리에 들어서자 차를 들고있던 영봉이 즐겁게 웃으며 물었다.

 “내가 네 일정을 방해한 건 아닌지 모르겠다.”

 “아닙니더, 스님.”

 수련이 강하게 부정하며 맞은편에 앉자 영봉은 다시 환히 웃었다.

 “그래 학교생활은 재미있는고?”

 “예, 스님.”

 “지금 축제 중이라고?”

 “예.”

 그 때 찻집여자가 물컵을 들고 와 둘은 말을 그쳤다. 여자가 물컵을 내려놓고 수련을 바라보며 물었다.

 “학생은 뭘 마실까?”

 수련은 대답 대신 영봉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여다보았다.

 “스님은 뭘 드셨는데요?”

 여자가 대신 짧게 대답했다.

 “민들레차.”

 “그럼 저도 민들레차 주시소.”

 수련의 그 순진한 미소에 여자가 상큼 웃고 돌아서자, 영봉도 무심히 웃음을 피워 올렸다.

 “요즘 대학생들은 축제 중에 주로 뭘 하노?”

 “연극, 가요제, 미술전람회……, 또 막걸리 파티도 하고…….”

 수련이 미처 꼽지 못한 새끼손가락을 들여다보고 있자 영봉이 즐겁게 웃고 입을 뗐다.

 “학교 다닐 때만큼 좋은 시절은 없다. 축제 때는 축제를 마음껏 즐기고, 미팅 때는 남학생들과 즐겁게 어울리고, MT 때는 최선을 다해 참여하고…….”

 “…….”

 “난 어리석게도 그걸 즐기지 못했어.”

 “와예?”

 “그 놈의 고시에 빠져서…….”

 허공을 바라보다 민들레, 그 그윽한 향기를 들이키는 영봉의 두 눈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젊음을 온통 책 속에 묻었던 그에게는 청춘다운 젊음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모래시계세대답게 민주화운동에 몸을 바친 것도 아니었다.

 그는 대학 3학년 때 사법시험을, 그리고 4학년 때 행정고시와 외무고시에 모두 합격해 권력의 길이 훤히 내다보이는 수재였다. 졸업 후 일반의 예상대로 검사의 길을 택했던 그는 채 1년도 채우지 않고 자유의 길로 방향을 틀어버렸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선택이었다.

 그로부터 15년. 이제 모든 것에 달관한 그가 마음껏 보내지 못했던 젊은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마음을 읽은 수련이 응석이 담긴 눈으로 영봉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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