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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없는 사랑
이 세상에 없는 사랑
  • 김루어
  • 승인 2013.03.14 19:05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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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김 루 어

 원고작업을 한다고 책상 앞에 앉았는데, 나도 모르게 꾸벅꾸벅 조는 일이 많아졌다. 봄은 봄인가 보다; 집 앞 목련은 봉오리가 눈에 띨 정도로 커지고, 가로수의 잎들은 눈이 시릴만큼 파릇해진 것을 보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잠을 쫓기 위해서. 봄은 나른한 때다, 춘곤(春困)이란 말이 있을 만큼. 하지만 내가 조는 것은 봄 탓만은 아닌 것 같다. 어릴 때부터 유난히 잠이 많아 별명이 잠순이였던 것이다.
 어릴 때, 나는 할아버지 품에서 자랐다. 그제나 이제나, 어린아이가 노인과 노는 것이 재미있었을 리가 없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떼를 쓰거나 칭얼댔고, 달래다 달래다 지친 할아버지는ㅡ 금자둥이, 은자둥이로 시작되는 자장가를 불러 주었는데, 그런데, 그 자장가만 불러주면 떼쟁이 손녀는 믿기 어려울 만큼 쉬이 잠들었다, 고 한다. 내가 잠들면 할아버지는 서안(書案)앞에 앉아 한적(漢籍)을 넘기거나, 때로는, 내가 깨지 않을 정도의 낮은 소리로 시전(詩傳)을 읽고는 했었다.
 그런데 나는, 잠귀가 유난히 밝았다. 하지만 앙큼하게도, 나는 잠이 깬 표시를 내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읊조리는, 뜻도 모르는 시전에 먹인, 그 가락이 너무나 안온하고 평화로워서였다. 지금도 기억한다. 입 밖으로 나올 정도는 아니지만, 입속으로 느리게 가락을 먹여 읊어 내려가던 할아버지의 시흥에 취해 읊조리던 그 유장한 시전의 가락을. 아마 유년의 그 경험은 내가 시에 다가가는 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시인으로써 제대로 이름을 얻지 못한 것을 보면, 시재는 별로인 것이 증명된 것 같지만, 시를 읽는 것은 여전한 즐거움이어서, 구글링을 하다 국내에 소개되지 않은 좋은 시를 발견하면 편집하여 출력 제책하는 것은 내 일상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나만을 위한 제책본시집들이 서가 칸을 채워 갈 때마다, 나는 내 시집을 내는 것 같은 애착을 갖는다. 그 시집들 가운데 무작위로 한 권을 뽑아 읽어 내려갔다.
 시에 눈을 주자, 어릴 때 경험은 습관이 되어 잠은 바로 달아났다. 어쩌면 이는 내가 갖지 못한, 이 시인들의 탁월한 언어의 조율과 시에 투영시킨 삶에 대한 성찰과 인생관의 절절함이 흡반(吸盤)처럼 나를 빨아들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시를 읽으며 쪽을 넘겨가다 문득, 넘긴 쪽 첫 시 모두(冒頭)에서 전율로 눈이 얼어붙는 느낌이 되었다.「그이를 만나려면 무엇을 바쳐야 할까?/물론 내 삶 전부를 바쳐야겠지, 바쳐야겠지.//그래도 충분하지 않아!/ ……이하 략(略)」(디킨슨 전시집: 시 247번) 
   처음 읽는 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전율은 그전보다 더 컸다. 에밀리 디킨슨이 아니면 쓸 수가 없는 시행! 시인명을 확인하니, 아니나 다를까 디킨슨이었다. 여고 이래로 그녀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여성시인이다. 당시 이미지즘에 빠져있던 내게, 이미지즘에 형이상학이 가미된 그녀의 시는 경이였다. 거기 더하여, 은자적이었던 그녀의 삶 또한 외경적 전범이어서, 그녀는 내게 정녀(淨女)이고 정녀(貞女)였다.
 그런데, 인식능력이 고양된 뒤 내게 다시 온 디킨슨은 이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전기 작가에 따르면, 정녀로 알았던 그녀에게도 사랑이 있었다, 그것도 두 번이나. 첫 번째는 서른에 당한 실연이다. 상대는 유부남이었다. 사람은 이 세상에 있어도 그를 소유할 수 있는 방법은 이 세상에 없는 사랑이었던 것. 이 실연의 여파로 그녀는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이 생겼다. 두 번째 사랑은 그 보다 훨씬 늦게 왔다. 상대는 아버지의 동료인 법률가로 18년이나 연상인 남성이었다. 물론, 가정이 있는 사람이었다.
 디킨슨처럼, 이 세상에 없는 사랑으로 눈물 흘리던 또 다른 시인 한 분을 나는 알고 있다. 그분은 여고 때 아랑제 백일장을 계기로 사제관계를 맺은, 청마시인과의 로맨스로 원치 않게 세인들 입에 오르내린, 당시 심사위원장이었던 정운선생이다. 선생에게 과분하게 사랑을 받아 일 년 넘게 사숙을 받았는데, 돌아가시기 몇 달 전에 당돌하게, 사랑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은 적이 있었다. 그 때 나는 스무 살, 꽃피는 처녀였다. 선생은 눈물 그렁한 눈으로 한 동안 먼 산을 응시하더니 나직하게 당신의 시「탑」을 읊어 주셨다.
 「너는 저 만치 가고/나는 여기 섰는데/손 한 번 흔들지 못하고/돌아선 하늘과 땅/애모는 사리로 맺혀/푸른 돌로 굳어라/정작 마주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서로 야윈 가슴 먼 창만 바라보다가/그대로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리라.」
    두 여성 시인에게 온 사랑은 절망 그 자체다. 퓨리턴 혹은 유교집안 딸인 그이들로서는 그 사랑에 다가갈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이들은 그 절망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이 세상에 없는 사랑을 시로 승화시킨다. 실연이 인생의 끝이 아니라, 두 시인에게는 그것이 새로운 삶으로 가는 전환점이었던 것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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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원 2013-03-22 16:31:14
세상에 없는 사랑,
보이지 않는 사랑일지라도
그 사랑의 힘으로 새 사람으로 거듭남이 비단 두 시인뿐 아니라
범인인 우리도 그렇겠지요

글을 읽으면서 사랑이란 단어가 왜곡되지 않고
원래의 참뜻이 고요히 흐르길 바랄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봄날 2013-03-17 09:35:28
생강나무꽃을 땄습니다
알고보니 도심에 만들어둔 녹지에서도 흔히 있던 꽃이더군요
이 도시 외곽지에 있는 호적한 기슭을 엉금 엉금 올라갔습니다
그런 향기가 있는 줄은 몰랐더랬습니다
봄이 오긴 왔나 봅니다

지난 겨울 여태 입지 않았던 내복을 입고
칼바람 속 이를 악물고 뛰댕긴 내가
저만치 아른거립니다

^-^
생강나무꽃을 잘 말려 차로 만들어도 된다던데
마음만 그러고 있습니다.

이현준 2013-03-15 22:41:57
아직 3월인데 4월의 노래를...
시인님의 글을 읽으면서 내가 빠졌습니다. 3월인데 4월의 노래를 읖조리게 되니 말입니다.
사랑...유난히도 이 봄엔 사랑을 다시 일깨우게 되는군요.
시인님의 글이 내 마음의 봄을 깨우셨습니다.

강대선 2013-03-15 13:03:34
시인님의 글에서 승화에 오랫동안 눈길이 머물렀습니다.
이룰 수 없는 사랑에
번개 맞은 나무처럼 속마저 시커멓게 타버릴지라도
봄이오면 다시 연한 싹이 돋아나듯이
사랑은 그렇게 기적이 되는가 봅니다.
아픔에 무너지지 않고 참고 견디며 마침내
한 송이 꽃을 피워내는 마음...
시인의 마음일 것입니다.
아파서 좋은 글에 머물다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