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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쫓겨난 시대(時代)
믿음이 쫓겨난 시대(時代)
  • 김루어
  • 승인 2013.03.07 20:36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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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김루어
  불교에서, 존재란 상대적이다. 연기론이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즉, 이것이 있음으로 저것이 있다. 곧, 네가 있음으로 내가 있다. 이 명제는 양자가 상호별개가 아닌 상호 상즉상입(相卽相入)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화엄경은, 이 세상을 설명하는 원리로 이를 연장 확대한다: 이 세상을 유정물과 유정물, 혹은 유정물과 무정물, 또는 무정물과 무정물이 날줄과 씨줄이 되어 서로를 얽은 매듭인 그물코가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이어지는 그물이라고 일반화한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 말은 매듭이다. 왜냐하면, 이 매듭이 유정물이나 무정물이라는 개아(個我)를 얽어 그물로 만드는 매개이기 때문이다. 이 매듭을 불교적 용어로 옮기면 인연(因緣)이 될 것이고, 요즘말로 풀어보면 관계가 이에 정합되는 용어가 될 터이다. 유정물이든 무정물이든,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상은, 인연 즉, 관계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존재는 결코 있을 수가 없다. 특히, 사회적 존재인 인간은 더욱 그러하다.
 인간이란 존재자체가 부와 모라는 존재의 관계에서 태어난 관계적 존재이다. 관계에는 즉자적인 관계와 대자적인 관계가 있다. 즉자적인 관계는 개인이 선택할 수 없는 관계이다. 즉, 부모형제나 친족, 또는 국적이나 고향 같은 생래적인 관계이다. 대자적인 관계는 후천적으로 맺는 관계ㅡ친구나 사제, 연인, 동료…… 등등과 같은 관계이다. 개인은 성장해가면서, 즉자적인 관계에서 대자적인 관계로 자신의 관계를 확장시켜 나간다.
 이렇게 관계를 확장할 수 있는 추동력은 상호간에, 인간에 대한 믿음이 전제로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믿음은 인간관계의 기본이어서, 믿음이 없으면 서는 것조차 불가능하다, 는 공자의 말은 아직도 유효하다. 믿음이 없이 사랑이, 믿음이 없이 우정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믿음이 없이 가정이 유지되고, 믿음이 없이 사회가, 국가가 영위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 또한 없을 터이다.
 우리 사회는 지난 반세기 동안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산업사회에서 정보사회로 급격히 변전해왔다. 정보사회는 통상적으로 신용사회라고 불린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신용사회라는 이 시대에, 믿음이란 전통적 가치가 흔들리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어쩌면, 이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일견 비슷하게 보이는, 믿음과 신용이라는 양자 간에는 건너기 어려운 깊고 넓은 심연이 놓여있기 때문이다.
 신용사회라고 할 때의, 신용이라는 말은 인간의 가치를 계량화하고 수치화한 지표개념이고, 이 지표의 척도는 이 시대 집단표상인 ‘돈’ 이라는 카르마(karma: 業)이다. 따라서, 신용이란 말은 지표라는 뜻이 된다. 이에 반해, 이전까지 인간관계의 기저를 이루어 온, 믿음이란 말은 한 인간의 전 인격을 담보한 도덕적인 개념이다. 그래서, 신분이 다른 춘향과 이도령 간에도 사랑이 가능할 수 있었고, 무일푼 딸깍발이에 불과한 허생도 장안 제일 갑부에게 거금을 빌릴 수가 있었다.
 이 시대는 많은 영역에서, 믿음이 있던 자리에 지표가 들어섰거나, 지표가 믿음을 쫓아내고 있는 상태다. 경제를 포함한 몇몇 공적영역은 바뀐 시대 탓에 이 지표의 적용이 불가피 하다 하더라도, 사적 영역에까지 이 지표가 적용되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다. 신분과 재력이 다르면 서로 호감을 가진 청춘남녀도 교제가 불가능하고, 반급우이어도 우정이 불가능하고, 직장에서도 직위가 다르면 대화까지 불가능한, 작금의 현실은 개념대체가 인간관계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 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그러나 누구도 이를 심각하게 보지 않는 것 같다. 심각하게 보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당연시하고, 심지어는 조장하기까지 한다. 이를 조장하는 대표적인 집단은 정치권이다. 선거 유세 시에는 온갖 감언이설로 유권자를 호리던 정치인들은, 당선이 되면,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애매한 말로 공약을 흐리기 시작한다. 그들은 자신들의 식언을 합리화시켜주는 도피구를 찾는데 바빠, 지도층이라 자임하는 자신들이 앞장서서 믿음을 흔들어, 인간관계를 붕괴시키는 행위를 선도하고 있다는 것을 자각조차 하지 못한다.
 그러면, 인과응보를 말하는 불교에서는, 관계를 붕괴시키는 자에게는 어떤 응보로 대응할까? 모두(冒頭)에 인유(引喩)한 화엄경으로 돌아가 보면 우리는 다소 실망하게 된다. 왜냐하면, 화엄경은 어떤 응보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정한 암시는 하고 있다: 그물에는 매듭마다 보석이 있어, 거기에는 매듭을 만드는 씨줄과 날줄뿐만 아니라, 매듭들에 붙어 있는 모든 보석도 비추니, 당연히 그것을 헝크르는 자들의 행태도 연쇄적으로 비추인다,  고…… 이후는 상상영역이다. 어차피, 지옥은 상상계 아닌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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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윤 2013-04-02 15:40:45
예전엔 사람만 똑똑하면 개천에 용이 났다는데
요즘은 개천에 용이 날 수도 없는 현실이 참 안타깝습니다

끼리끼리란 좋은 의미도 있겠지만
더불어 어울릴 수가 없는 편 가름이라는 것은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습니다.

외양이 아닌 내면의 가치를 볼 줄 아는 시선,
사회 속 사람 사이의 믿음이 아쉽습니다
믿음의 참 뜻이 무엇인지
시인님의 글을 계기로 한 번씩 되짚어 보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

강대선 2013-03-08 07:39:24
우리 사회의 믿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믿음이 근간이 흔들리니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고 경계하고 그 도를 넘어 미움이 되니 이웃이 두렵게 되고 마음의 문을 닫게 되는 것이겠지요. 제 자신을 돌아봅니다. 다른 이들에게 믿음을 주고 있는지
제 자신에게도 믿음 있게 행동했는지, 지난 시간을 돌아보고 보다 나은 내일을 생각합니다.
시인님의 글이 아침을 기쁘게 대할 수 있게 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