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8 22:05 (목)
  • 김루어
  • 승인 2013.02.14 1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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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 김 루 어

 날씨는 여전히 쌀쌀한데 어제 오늘 계절이 변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어쩌면, 입춘이 지나고 설이 지나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가만히 살펴보면, 미약하지만 바람이 부드러워지고 있고, 사람들의 입성도 다소 가벼워지고 있는 것 같다. 실제로 오늘 아침 동네공원에 산책을 나갔다가 계절변화의 한 전령을 만났다. 무심히 보아온 공원 헐벗은 나뭇가지들에 새 눈이 돋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 알게 모르게 계절이 변하고 있었다.
 곧 대동강 물이 풀린다는 우수(雨水)와, 개구리가 동면에서 깨어난다는 경칩(驚蟄)이 지나면, 대지는 완연한 봄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이는 계절의 순환인 자연의 봄을 말할 뿐, 봄의 의미를 다 설명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봄이라는 단어는 경우에 따라 시작, 젊음, 희망, 깨달음, 꿈…… 등등으로 너무나 다의적으로 쓰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로 쓰이는 봄은 눈에 보이는 봄이 아니라, 우리 인간의 마음에 맺힌 상(像)들이기 때문에, 나는 이러한 의미의 봄을 자연의 봄과 구별할 필요가 있다고 여겨 심상(心像)의 봄이라고 이름 붙인다.
 이 봄은 자연의 봄과 일치 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다. 그리고 심상의 봄을 찾기 전에 자연의 봄을 먼저 경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내 경우, 그 경험은 농촌에서 보낸 유년시절이었다. 내 유년시절은, 그 가운데 겨울은, 순전히 봄을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나는 유년시절에 몸이 약해 병치레를 많이 했다. 너 키우는 게 다른 자식 열 키우는 것보다 힘들었다, 고 지금도 어머니가 말할 정도로. 특히 추위를 많이 타 겨울에는 집밖에도 제대로 나가지 못했다. 대신 나는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수를 놓거나 책을 읽으며 봄을 기다렸다. 아마 그 때 나는 처음으로 「봄」이라는 말이 지닌 따뜻함과「기다리다」라는 말 뒤에 숨은 인고를 어렴풋이 짐작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봄은 확실히 기다릴만한 가치가 있는 대상이었다. 개울물이 녹고, 버들강아지가 눈을 뜨고, 진달래가 피면, 나도 다른 아이들처럼 마음껏 밖으로 쏘다닐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바구니를 옆에 끼고 동네 또래 친구들과 들에 나가는 것을 좋아했다. 양지바른 논두렁 밭두렁에는 쑥이나 달래, 냉이, 씀바귀, 돌미나리 따위의 봄나물들이 지천이었다. 나는 그들을 캐는 것보다 그들을 보고 냄새 맡는 것이 더 좋았다. 파릇하게 순을 내밀고 있는 그들의 여린 모습이 내게는 꽃보다 더 아름다웠고, 풋풋한 그들의 내음은 꽃향기보다 더 은근하고 싱그러웠다.
 당연히 돌아올 때의 내 바구니는 또래들에 비해 가벼울 수밖에 없었다. 나는 또래들이 봄나물을 찬거리정도로 캐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작물을 수확하듯 이악스레 캐서는, 바구니뿐만 아니라 보자기에까지 싸서 이고 가는 것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집에 와 어머니에게 그 이유를 듣고 나는 친구들에게 한없이 죄스러웠다. 당시는 많은 이들에게, 우리 집은 다행히 거기에서 비켜나 있었지만, 봄나물이 일정 비율 대용식량역할을 하던 춘궁기가 남아있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아마 그때 경험은 어린 내 눈에 비친 인생의 첫 어둠이었을 것이다.
 다행히 나는 그 어둠밖에 있었다, 40대 중반까지는. 중간에 작은 기복들은 있었지만 내 삶은, 봄이나 여름은 아닐지라도, 겨울밖에는 서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일패도지했다. 갖고 있던 많은 것을 잃었다. 아마, 욕심이 부른 화였을 것이다. 인생은 봄 다음이 여름이 아니라 겨울일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주변에서 희망, 재기, 꿈…… 등등의 말ㅡ내가 말하는 심상의 봄을 말하며 격려와 힘을 주었지만, 나는 심상의 봄을 어떻게 가질 수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 아직 알지 못한다. 다만, 많은 선인들이 심상의 봄을 찾아 긴긴 겨울 골짜기를 헤매다 남긴 기록을 위안으로 삼으며 마음을 비우고 작은 꿈 하나만 움켜쥐고 살아갈 뿐이다.
 아래는 내가 위안으로 삼는 선인들 기록 가운데서도 수시로 읊조리며 위로를 받는 척재(惕齋) 이서구(李書九 1754~1825)의 오언절구 류춘동(留春洞)이다. 번역은 직접한 것인데, 아마 세상에 유통되고 있는 번역과는 차이가 있을 터이다. 심상의 봄을 찾는 누군가에게 내 경우처럼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 외람됨을 무릎 쓰고 시를 번역해 올린다.

 나무 내음 꽃향기 끊이지 않고 뜰 풀은 푸름을 새롭게 더해가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늘 있는 이 봄은 오직 고요한 사람이라야만 볼 수가 있으리라.(林花香不斷. 庭艸綠新滋. 物外春長在. 惟應靜者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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