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
고향
  • 김루어
  • 승인 2013.02.07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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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흔히, 현대인들은 고향을 잃어버렸다, 고 말한다. 이 말은 도시화와 관련이 있다. 도시화가 고향의 원형을 완전히 바꾸어 버렸기 때문이다. 도시화는 아스팔트로 표상된다. 그 아스팔트에서 성장기를 보낸 아이들은 아스팔트 킨트라 불렸다. 그들 부모세대가 마을 고샅길이나 들과 냇가에서 놀며 성장한데 반해 이들은 아스팔트에서 놀며 성장했다. 이렇게 자란 이들에게 부모세대에게 전해들은 고향이란 말은 공간개념이 아니라 단어일 뿐이었다. 이들에게는 시골이 아니면 모든 도시가 고향이다. 어느 도시에 살건 그 환경이ㅡ아파트나 건물, 도로나 학교, 그리고 공장이 다 성장지의 그것들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다만, 대소와 장단, 고저의 차이가 있을 뿐. 
   아스팔트 킨트라 불리던 이들이 부모가 된지도 오래 되었다. 이 세대의 자녀들은 놀이터 보다는 컴퓨터에 더 관심이 있다. 이들에게는 컴퓨터만 있으면, 집이든 학교든 길이든, 모든 곳이 다 놀이터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들이 노는 공간은 물리적공간이 아닌 사이버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공부는 물론, 독서도, 운동도 컴퓨터로 하고, 우정도 컴퓨터로 쌓는다. 이들과 컴퓨터는 한 몸이다, 밥을 먹을 때도 그 앞에서, 심지어는 잠도 그 앞에서 잘 정도로. 이 세대를 나는 아스팔트 킨트에 빗대어 사이버 킨트(cyber kint)라고 부른다. 이들에게도 고향이란 말은 개념이 아니라 단어일 뿐이다. 하지만 의미에는 차이가 있다. 부모세대의 의미가 정적인데 반해 이들이 받아들이는 의미는 동적이다. 애초에 고향이란 공간개념이 없는 이들에게, 고향이란 말이 동적인 의미로 다가오는 것은, 공간이동이 자유로운 사이버에서 만큼이나 자연스럽다.
 사이버 킨트 1세대는 이미 사회에 진출했거나 직장을 구하는 중이다. 이들은 앞 세대와 달리 평생직장을 구하지 않는다. 이들은 한 직장에 뿌리 내리기보다는, 조건만 맞으면 얼마든지 직장을 옮겨 다닌다. 직장의 소재지가 타국이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고향과 마찬가지로 국적도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일 뿐이다. 소위 말하는 디지털 노마드가 이들이다. 설익은 프랑스 물을 먹은 일부 먹물들은 이들을, 유목민처럼 생을 자유롭게 옮겨 다니면서, 새로운 삶과 자유로운 사유를 통해, 자본권력이나 국가권력에 구속되지 않는 새로운 생존형태를 창출하는 자들이라고 부추기기도 한다. 그러나 현실은 몇몇 철학자가 골방에서 뱉어 놓은 말을 담은 책과는 다른 것이다.
 디지털 노마드로 불리는 이들은, 노마디즘이론 수입자들의 선전처럼, 새로운 인간형의 긍정적인 가능성을 보여주는 면도 있지만, 크게 보아, 두 가지 측면에서는 호도되어서는 안 될 그늘도 있다. 거시적인 측면을 먼저 들면, 노마디즘 주창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현실에서는 이들이 자본주의를 국제화로 분식하는 도구로 쓰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타 문명을 압박하는 기계문명의 패권을 돌리는 톱니바퀴로 쓰이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는데도 원전 운운하며 이를 오독이라 강변하고, 역사에 선명히 기록된 노마디즘이 갖는 반생태성, 비지속성, 약탈성의 증거마저 부정하는 것은 그야말로 가소롭기 짝이 없는 일이다.
 미시적인 측면은 디지털 노마드 개인들의 그늘이다. 정주적 삶에 구속되지 않고 정형적 사유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을 찾아 나설 수 있는 이들은 구세대에 비하면 분명 축복받은 세대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낭만적이지만은 않다. 새로운 삶을 찾아 끊임없이 떠돌고 머물고 있는 곳이 고향이라 미화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그들이 발 딛고 선 곳은 경쟁에서 밀리면 탈락할 수밖에 없는 생존을 건 전장이다. 더구나 그들에게는 안식할 곳조차 없다. 그들은 휴가지에서 마저 스마트 워크(smart work)라는 미명 아래 마음 놓고 쉬지도 못하는 신세가 되어 있다. 말하자면 역유비쿼터스 상태라고나 할까.         
 내일모레면 설이다. 고향을 떠나 있던 이들은 귀향준비로 마음 설레일 테고, 고향에 남아있는 이들은 그들을 맞을 준비로 마음 설레일 터이다. 그러나 이때의 향(鄕)은, 본래의 의미의 향이라기보다는 부모를 뵈러가는 의미로 축소된 향이다. 물론, 디지털 노마드라 불리는 이들도 명절에는 귀향할 터이다. 고향은 없어도 부모는 있을 터이기에. 하지만 명절의 이런 최소한의 귀향에도 변전의 조짐이 보인다. 자식 편의를 위해서 부모가 자식에게 가는 일이 늘고 있고, 설상도 직접 마련하지 않고 주문 설상으로 대체하는 경향도 보이기 때문이다. 씁쓸하고 쓸쓸한 일이다. 내가 아날로그 마인드이어서 일까? 나는 이런 시대가 두렵기 짝이 없다. 고래로, 낙엽은 뿌리로 돌아가고 만물은 하나로 돌아간다고 했다.

그 하나는 지금까지는 고향이었다. 그 하나가 부정되고 없어져가는 이 시대, 미래세대인 우리 아이들이 돌아가야 할 그 하나는 과연 어디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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