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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당선인과 엘리자베스 1세 여왕
박 당선인과 엘리자베스 1세 여왕
  • 송종복
  • 승인 2013.02.04 18: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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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 종 복 경남 향토사연구회 수석부원장
  처녀 여왕인 엘리자베스는 "여왕으로 결혼하느니 걸인으로 독신이 되겠다"며 자신의 충절은 국가에 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밝혀 구혼자들을 거절했다고 한다. 이후 엘리자베스는 영국의 운명이라는 상징이 되었고, 조국과 결혼한 여왕이 돼 국민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그녀가 여왕이 되기까지는 많은 우여 곡절이 겪었다. 즉 "내가 연약한 여자의 몸을 가진 것을 안다. 하지만 나는 왕의 심장을, 그리고 영국왕의 심장을 가지고 있다"라고 한 말은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Armada)를 무찌른 전쟁의 공격 전날 밤에 한 말이다.

 앨런 액슬로드 말에 의하면 "엘리자베스 1세의 즉위 직전에 영국은 부도직전이요, 재정파탄 상태였다. 그러나 강력한 리더십과 지도력으로 최강의 영국을 만들었고, 세익스피어와 밀턴 같은 인물을 배출했던 이를 바탕으로 르네상스의 꽃을 피우게 됐다"고 하니 450여 년 전 영국인은 여왕을 모셨던 것이 진정으로 부럽기만 하다.

 한국의 현실은 어떠했는가? 세계 최초로 탄생한 신라의 선덕여왕은 중국의 측천무후(여왕)보다 50년이나 앞섰으며 서양의 엘리자베스(여왕)보다 근 천년이나 앞섰다. 강대국인 미국과 러시아는 아직도 한 명의 여왕이 없었던 것을 보면 우리나라는 대단한 민족이라고 자부하고 싶다.

 5천년 역사를 보면 3명의 여왕이 있었다. 신라 27대 선덕여왕(김덕만 632-647)은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으로 남들이 꺼려했던 김춘추와 김유신 장군을 발탁해 훗날 삼국통일의 기반을 마련했다. 또 분황사, 첨성대, 황룡사 9층목탑 등 신라시대 최대 최고의 문화유산을 남긴 위대한 왕이다. 28대 진덕여왕(김승만: 647-654)은 정치적으로 알천을 상대등으로 임명해 국정의 안정을 되찾았고, 김춘추를 앞세워 `한화정책`을 시행해 대당외교와 혁신적인 정치개혁을 단행했다. 51대 진성여왕(김만: 887-897)은 지방의 조세를 면제해 주며 농민을 구휼하는 정책을 펼쳐 민심을 수습했으나 말년에는 실정을 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즉위 직후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두 가지로 첫째는 인재를 적재적소에 등용한 것이 최대의 성공요인으로 꼽힌다. 두 번째는 화폐개혁을 통한 경제 건설이다. 즉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토마스 그레셤의 건의를 받아들어 화폐개혁을 단행해 경제성장의 기반을 다졌다. 통치가 끝난 뒤에도 그 여력으로 해상패권을 잡았고, 영국 화폐 가치가 올랐고, 또한 북미에도 식민지 개척이 시작됐다. 런던 증권거래소와 동인도회사도 설립하고 세계의 중심국가로 발돋움했다. 영국인들의 심성에 `여왕이 즉위하면 국운이 상승 한다`는 믿음이 자리 잡은 것도 빅토리아 여왕과 엘리자베스 여왕 덕분이다.

 우리도 자화상으로 희망을 걸어본다. 현재 우리의 상황은 긴박하다. 즉 미국과 중국, 러시아와 일본 등 한반도를 둘러싼 4대 강국 모두 올해 정권이 바뀌거나 집권 2기를 맞아 국제협력과 조율보다는 자국의 이익 챙기기를 우선하는 경향이 짙어진다. 북한도 3대 세습을 맞아 인공위성발사, 핵실험 등 호전성이 여전하고 경제적으로는 환율과 무역전쟁, 지역적으로는 영토분쟁까지 우려되는 상황이다.

 박 당선인과 엘리자베스 여왕은 공통점이 적지 않다. 불행하게 어머니를 잃었고 알게 모르게 정치적 은둔기간을 강요받았다. 처녀라는 점도 같다. `명예와 정직을 중시하고 진실을 말하는 것을 최고로 삼는다`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가치관과 `원칙과 상식을 중시한다`는 박 당선인의 모토와 맥락이 일맥상통하다. 따라서 박 당선인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은 엘리자베스 1세 영국 여왕을 본보기로 국운의 융성이 있었으면 하는 것이 민초들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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