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6 04:10 (금)
여행은 기제(機制)다
여행은 기제(機制)다
  • 김루어
  • 승인 2013.01.24 19:2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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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많은 사람들에게, 현실이란 벗어나고 싶은 새장과 같은 것이다. 이는 내가, 우리가, 마음껏 푸른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는 날개를 가진 새라는 착각을 하고 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새가 된 기분은 이내 깨어졌다, 고속버스를 타자마자 비가 내렸던 것이다. 날개를 젖게 하는 비. 하지만, 버스가 비를 막아 주는 처마역할을 하기에 그렇게 실망할 필요는 없었다. 더구나 버스는 처마와 달리, 움직이는 날개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지 않는가.
 비가 내리는 차 창밖을 내다보았다. 내가 떠나 온, 잔설로 얼룩진 도시의 풍경들이 흘러간다. 잠시나마 현실을 풍경처럼 두고 떠나는 몇 달만의 여행ㅡ아니, 일 때문에 나서는 서울행이므로, 여행이라는 표현이 어의적으로는 맞지 않다. 하지만, 여행의 기회를 좀처럼 갖지 못하는 나는 이런 출타도 여행으로 생각한다. 여행이란 내게는 탈출구역할을 한다. 수십 년을 살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삶의 침윤(浸潤), 돈도 되지 않는 시와 산문의 주박(呪縛), 이런 한 겨울에는 가슴에 마저 너테가 끼는 것 같은 자기함몰, 그렇지만 돌리지 않으면 바로 쓰러질 것 같은 일상이라는 쳇바퀴에서의 탈출구 역할을!
 이렇게 말하면 경험 많은 여행자인 것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실제의 나는 여행 동경론자에 지나지 않는다. 내게는, 특히 청춘기에는, 제대로 여행을 다녀 본 기억이 거진 없다. 아마 여자라는 제약, 완고한 아버지,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아주 없지는 않다, 딱 두 번의 강렬한 청춘기 여행경험이 있기는 하다. 한 번은 대학시험을 치고 친구와 함께 간 겨울 제주도 삼양해변여행이고, 다른 한 번은 그 몇 년 뒤 직장인이 되어 어느 여름 업무 차 간 강원도 황지여행이다.
 그 두 번의 여행은 사물과 세상을 보는 내 시각을 바꾸는 기제(機制)가 되었다. 삼양해변의 검은 모래는, 모래는 당연히 황금빛이라는 내 선입견을 여지없이 바꾸어 놓았고, 황지여행은 우리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연탄 한 장이 만들어지는 과정의 전율을 몸으로 느끼게 해주었다. 당시의 황지 풍경은 지금 생각해도 숨이 막힐 정도다. 검은 하늘 검은 땅 검은 집 검은 물, 심지어는 공기마저 검어서, 목이 칼칼해 뱉어보면 검은 가래가 나왔다. 그런데도 우리들 중의 누군가는, 연탄 한 장을 만들기 위해 생명을 담보로, 지하 수백 미터 갱도까지 내려가 석탄을 캐야했던 것이다.
 내게는 인생이란 살아도, 살아도 익숙해지지 않는 낯선 길이다. 여행 또한 그런 속성이 있다는 점에서 양자는 비슷한 데가 있다. 그래서인지 여행은, 어떤 지점에서는, 인생의 낯선 길을 미리 보여주기도 한다. 그래서 여행을 많이 하는 것은 인생길의 낯 섬을 미리 보아 인생길의 위험도를 낮추고 면역력을 높이는 일이 된다. 이는 아마, 인생 그 자체가 여행인 때문이겠다. 물론, 인생길과 여행길에는 다른 점도 있다. 인생길은 돌이킬 수가 없지만 여행길은 언제든 돌이킬 수 있는 차이ㅡ하지만, 이 차이는 오히려 여행에 대한 부담감을 줄여주는 유혹일터!
 새장 같은 현실의 탈출구가 되는 것만으로도 여행은 더없이 유혹적이다. 그러나 일상에서의 탈출, 장소이동, 풍경변화, 낯선 이들과의 조우만으로 우리 삶이 변할까? 우리 삶이 변하기 위해서는 여기에 무언가가 더 필요하다.
그것은 사물과 인간, 그리고 세상을 보는 시선의 변화다. 그래야만이 여행은, 일상이라는 새장, 일의 주박, 삶의 침윤, 자기 함몰에서 벗어나게 할 변화를 불러오는 기제가 된다. 이렇게 될 때 여행은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 될 것이고, 이렇게 될 때 여행은 우리 정신을 젊어지게 하는 맑고 푸른 도래샘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말해보아도, 과감히 떠나는 여행자가 되지 못하는 나는 여행 동경론자에 지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전히 나는 현실의 연장에 불과한 출타를 여행이라고 의제(擬制)하는 소심한 생활인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므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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