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5 23:45 (목)
소음 유감
소음 유감
  • 김루어
  • 승인 2013.01.17 18:5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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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상에 올라가니,모처럼 아침햇살이 밝았다. 널어놓은 빨래는 잘 말라 있었다. 어제 오늘 제법 풀린 날씨탓이리라. 빨래를 걷어 계단입구에서 동네를 내려다본다. 높고 낮은 건물들: 주택들,상점들,저만큼 보이는 놀이터,그 오른 쪽에 유치원. 골목길은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듯 인적이 드물고,멀리 보이는 도로에는 차량이 한산하다. 한 움큼 흰 얼룩처럼 남은 눈만이,시릴만큼 밝은 아침햇살에,거울처럼 군데군데 빛 날뿐,동네는 그야말로 고요와 정적뿐이다. 도심에서는 아침에나 만날 수 있는 고요와 정적이다.  
 고요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상태다,라는 말이 있다. 어쩌면,이런 겨울 아침을 두고 한 말 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계단을 내려오는 내 마음은 우울하다. 왜냐하면,저 고요와 정적도 한 시간이 지나지 않아 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곧 도로는 차 소리로 넘쳐 날 테고,티눈처럼 박힌 동네상점들은 굉음 같은 음악을 틀어 델 테고,골목은 트럭을 몰고 건달처럼 휘젓고 다니는 잡상인들의 확성기소리로 넘쳐 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도심에는 겨울에도 고요가 없다,생존을 위한 소음과 악다구니만 있을 뿐!
 세계나 사상(事象)을 해명하는 논리 중에 이원론(二元論)이라는 게 있다. 이 세상,또는 이 세상에 있는 사상을 대립 혹은 대응하는 두 요소의 길항(拮抗)과 착종(錯綜)의 산물로 설명하는 논리다. 이를테면 이 세상은 음과 양의 길항과 착종의 산물이고,인간은 물과 불의 길항과 착종의 산물이라는 식이다. 논자마다 드는 두 요소는 다르지만,앞에 든 것을 제외하고,많이 거론 되는 두 요소를 나열해 본다면,하늘과 땅,남과 여,선과 악,홀수와 짝수,해와 달,몸과 마음,빛과 어둠…… 등등이 될 것이다.
 나는 여기에 소리와 침묵을 추가하고 싶다. 나는 소리를 네 종류로 대별한다. 첫째는 인간의 말이다. 둘째는 자연의 소리다. 새소리,바람소리,물소리 따위다. 셋째는 인공적인 소리,즉 차 소리,기계소리 따위다. 이 세 종류의 소리는 우리 인간이 살아가는데 필수적이거나 필요악적인 소리이다. 마지막으로는 소음이 있다. 소음은 전술한 세 종류의 소리가 임계치를 넘을 때 발생하는 소리다. 이 네 가지 소리의 반대편에 침묵,다른 말로 고요가 있다.
 이원론을 적용하여 인간세상을 정의해보자면,인간세상은 소리와 침묵이라는 두 요소의 길항과 착종의 결과로 나타난 산물이 되겠다. 바람직한 세상은 적절한 소리와 적절한 침묵이 길항과 착종의 황금비를 이룰 때임은 말할 나위가 없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어디를 가나 소리만이 넘쳐 난다. 버스나 택시를 타더라도 운전기사는 승객의 반응은 생각하지 않고 라디오를 한껏 틀어 놓는다. 주택가에 위치한 상점이나 교회,학교는 자기들에게 필요하다는 이유로,주민들 입장은 개의치 않고 음악이나 확성기를 한껏 틀거나 높인다. 이는 겨울이라고 별다르지 않다.
 겨울이라는 말은 겨시다(在,留)라는 중세어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중세는 농경사회였으니,산하가 식고 만물이 얼어붙는 이 계절에는,일부 계층을 제외하고는 집에 있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집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 단순히,쉬며 잠만 잤다는 뜻이었을까? 나는 이런 의아심 때문에,겨울은 거울이었다,라고 말하고 싶다. 모두가 알다시피 거울은 자신을 들여다보는 도구다. 그들은 집에 있으면서 겨울이라는 거울에 자신을 비춰 보면서,지난 일 년을 반성하고 다가올 일 년을 설계했을 것이다. 다른 말로하자면,겨울은 자기응시(自己凝視)의 계절이었음에 분명하다.
 자기응시에는 고요, 즉 침묵이 필수다. 침묵하지 않으면, 자기를 들여다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더구나 겨울은 사계 가운데,상대적으로 자기응시를 하기에 좋은,침묵의 계절이 아니던가. 그러나 온갖 소음들의 홍수 속에 사는 현대 도시인들은 조상들과는 달리 겨울에도 이런 고요를 누리지 못한다. 아니 어쩌면,그들이 보기에는 일이 없어 먹고 놀 수밖에 없었던 농경사회와는 다른,소음이 곧 소득이나 이익으로 연결되는 현대사회에는 고요 따위는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지도 모르겠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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