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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아이들
  • 김루어
  • 승인 2012.12.20 1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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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루어의 아침을 여는 시선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다. 워즈워드의 싯구에서 비롯된 이 말은,「 아이의 언행은 순수하고 옳아서 어른의 본보기가 된다」라는 뜻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나는 시간적 질서와 강상(綱常)의 위계를 뒤집는, 속담화 된 이 모순어법의 금언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고 싶다. 문제를 제기하는 실마리로 근래 몇 년간 아이들과 연결된, 내가 겪은 일련의 경험들, 그 가운데서도 가장 최근의 경험을 들어 본다.
 주초 전철 안에서 겪은 일이다. 전철 안에 들어섰을 때는 좌석이 차 있었는데, 다음역에서 내가 선 문 옆 자리가 둘 비게 되었다. 그 자리에 앉으려고 코트자락을 걷는데, 저기 자리 있다! 는 소리와 함께 열 살 남짓한 아이가 쪼르르 달려와, 내가 앉으려는 자리에 잽싸게 앉았다. 뜨악했지만 그 옆 자리가 있었음으로 거기 앉으려는데, 그 아이가 두 손으로 그 자리를 막으며 제 엄마를 불렀고, 바로 뒤따라온 삼십대 여성이 당연하다는듯 자리에 앉았다. 어이가 없어 내려다보는 나를 아이엄마는 외면했고 아이는, 마치 달리기시합에서 이긴 듯 득이만만한, 아이 특유의 천진난만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이와 비슷한 아이들의 언행을, 경우와 장소는 달라도, 식당이나 버스안 혹은 기차안이나 공연장같은 공공장소에서 적지 않게 보게 되었다. 그때마다 내가 놀란 것은 이런 행동을 하는 아이들 주변에 아이 엄마들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만약, 그 자리에 있던 누군가가 이런 행동을 하는 아이를 꾸짖는다면, 대개는 그 엄마에게 즉각적인 반격을 받게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만한 일에 왜 우리 귀한 아이 기를 죽이느냐고! 
   그러면, 워즈워드의 금언은 틀리는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하지만 이 말에는 인간 천성에 관한 시인의 독단이 전제로 깔려있다. 철학사에서 인간 천성을 논할 때는 성선설과 성악설이 치열하게 대립해왔지만, 손은 안으로 굽는 탓인지 성선설이 다수설이고 성악설은 소수설 역할을 해왔다. 워즈워드는 다수설에 속하는 신플라톤주의자였는데, 신플라톤주의의 아이 관(觀)을 요약하면 이렇다: 인간은 태어나기 전에는 완전한 존재였지만 태어나면서 불완전하게 되었다. 따라서 태어나기 전 상태에 더 가까운 아이가 보다 완전에 가깝다!
   철학을 포함한 인문학적인 논제들은, 증명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아서, 종종 비유로 말해진다. 그 전통에 기대어, 나는 인간을 나무에 비유하고 싶다. 아이는 나무로 치면 어린 나무다. 나무는 순수하기도 하고, 순수하지 않기도 하다. 나무는 옳은 것도 아니고, 옳지 않은 것도 아니다. 따라서 나무가 바르게 자라기 위해서는 가위질, 말하자면 교육이 필요하다. 성악설을 따르던 성선설을 따르던 인간에게 교육이 필요하다는 사실에는 양설이 동의해왔다.
 교육은 학교와 가정에 맡겨져 있지만, 보다 기본은 가정교육이고 가정교육의 주역은 부모, 그중에서도 엄마다. 하지만 우리시대 엄마들은 교육을 공부로 이해한다. 거칠게 말하자면 아이들은 공부 잘하라는 말 외에는 엄마에게 제대로 배우거나 듣는게 없다. 그녀들은, 자기 아이를 금쪽같이 여겨 싸고돈다. 그러 면 자기 아이가 귀하게 되는 줄로 안다. 하지만 젊은 엄마들이 모르고 있는 게 있다. 집에서 자기 아이가 남에게 귀하게 대접받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밖에서는 귀한 자기의 아이가 남의 눈에는 애새끼가 될 뿐이고 더 자라서는 사회의 문제아가 될 뿐임을!
  

  다시 말하거니와, 아이들은 순수하기도 하고, 순수하지 않기도 하다. 그들은 옳기도 하고, 옳지 않기도 하다. 그들을 옳고 순수하게 자라게 하는 것은 교육이고, 그 교육의 주역가운데 가장 중요한 이는 엄마들이다. 아이는 어른의 아버지가 아니다. 속담화된 금언이라고 다 옳은 것은 아니다. 워즈워드는 반쪽만 말했을 뿐이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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