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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거리 보호 위해 유기농 비료 생산 최선 다하죠"
"먹거리 보호 위해 유기농 비료 생산 최선 다하죠"
  • 원종하
  • 승인 2012.12.18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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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하교수가 만난 경제인의 인생 스토리⑧ 김해시 상동면 삼전비료 정경자 대표
▲  김해시 삼전비료 정경자 대표는 "농작물이 건강해져 나아가 국민들의 식단이 건강해지는 날을 꿈꾼다"고 말한다.

 1976년 최초 유기농비료 회사창업 자부심에 실패 버텨
"우리 비료 사용 풍작 땐 기뻐"… 유럽 등 수출 계획

 김해시 상동면에 위치한 삼전비료의 정경자(62) 대표는 유기농비료 생산에 20대부터 현재까지 37년 자신의 인생 전부를 쏟아 붓고 있다. 화학비료가 처음도입 돼 각광받았음에도 유기농비료 개발에 뚝심을 부렸고 3번이나 회사가 무너졌음에도 포기하지 않은 오뚜기 같은 신념과 정신이 있었다. 창업초기에 20대의 젊은 여성이라는 점이 회사 운영에 장애물이 될 수도 있었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또한 숱한 위기 속에서도 자신만의 원칙을 지키며 견뎌냈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소중한 먹거리 보호를 위해 유기농 비료를 생산하고  있다는 것에 대해 자부심과  더 나아가 FTA체결 이후 삼전비료가 우리 식단의 미래며 이는 대한민국의 미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는 정경자 대표를 만나 경제인으로서 37년 외길 인생을 걸어온 이야기를  들어보자.

 -삼전의 회사 명칭은 무슨 의미인가?
 "우리회사의 철학과 이념이 내포된 이름이다. 나무를 의미하는 한자 목(木)이 3개가 들어가면 빽빽할 삼(森)이 된다. 이는 숲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여기에 밭 전(田)을 합쳐 삼전비료가 탄생했다. 비료를 친환경적인 요소를 가지고 만들어 숲과 밭 모두 풍요롭게 하고자 하는 마음에 삼전으로 이름을 작명하게 됐다."
 -어떤 동기로 힘든 창업을 하게 됐는지?
 "1976년에 창업했다. 그때는 멋모르고 뛰어 들었다. 아버지가 은행에 다니셔서 넉넉한 집안에서 자랐는데 그냥 틀에 박힌 생활은 나의 성격에 맞지 않는다는 판단을 하게 됐고 엉뚱하게(?) 회사를 경영해 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이때 사회적으로 우리나라에 화학비료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화학비료의 등장은 농작물 수확량을 획기적으로 늘리는 결과를 가져왔고 당연히 화학비료에 대한 수요도 급증했다.
 이렇게 화학비료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시기였지만 반대로 우리 본래의 방법인 유기농비료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미치게 됐고 남편을 만나 서로 똑같은 생각을 하게 돼 성공 가능성을 믿고 과감히 창업했다. 창업 당시 우리나라에 유기농비료를 만드는 곳이 없어 농림부지정 부산물 비료로는 우리나라 1호로 창업을 하게 됐다."
 -76년에 창립해 지금까지 37년 동안 경영을 했다. 그동안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나?
 "남편과 결혼을 해 함께 창업을 했는데 남편은 내부 경영보다 외부 영업에 힘썼다. 그래서 내부 경영은 본인이 맡게 됐는데 20대 어린 나이에 여자이다 보니 직원들을 관리하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었다. 거기에 회사가 3번 정도 실패하기도 했는데 여러모로 어려웠던 시기이다. 서울에서 창업을 해 실패하고 다시 따뜻한 지역이 농사가 잘 되기 때문에 울산의 삼성 정관자리에서 재기를 꿈꿨다. 그러나 쉽지 않았다.
 또 실패였다. 갈 곳이 없어서 둘째 동생 결혼식이 있어 서울친정집에 가서 생활하면서 다시 돈을 모아 부산 장림으로 와서 다시 시작했다. 대저에다 퇴비공장을 만들어 하다가 점점 좁아서 현재의 상동으로 87년에 옮기게 되어 현재까지 경영을 하고 있다. 3번의 실패로 인해 `포기할까`라는 생각을 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유기농비료에 대한 확신이 있어 포기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에서 유기농비료 1호 회사이기 때문에 자부심도 있었고 또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가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참 미련한 것 같기도 하다.
 -미련하다는 말을 했지만 미련한 것이 아니라 한결같이 원칙을 지켜나가는 경영철학이 있는 것 같다. 그러한 개인 성격은 회사 경영에 어떠한 영향을 줬나?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항상 원리원칙을 지키며 살아왔다. 나이가 60이 넘은 지금도 가식적인 말을 잘 하지 못한다. 이러한 성격이 회사 경영에 큰 도움이 됐지만 때론 직원, 혹은 다른 사람과 마찰을 빚기도 했다. 어릴 적에는 이러한 나의 성격이 옳다고 생각했는데 나이를 먹으면서 조금씩 바뀌는 부분이 생기기도 한다. 농사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늘 성실하게 정직하게 농사를 지어야만 좋은 결실을 맺을 수 있다.
 한번은 이런 경우가 있었다. 우리제품의 비료를 쓴 농부가 좋은 결실을 맺은 후에 그 옆에 있던 농부가 그 까닭을 알고 우리 것을 사용하였는데 결과가 나쁘다면서 항의를 하러 온 적이 있었다. 그래서 이상하다 싶어 그 과정을 알아보았더니 처음에 잘 자라고 하니까 그 다음단계에서 비료를 줘야 하는데 그만 더 이상 신경을 쓰지 않고 있다가 흉작이 된 적이 있었다. 이렇듯 늘 사람을 대하듯 한결같은 마음으로 성실하고 정직하게 농사를 지어야 한다."
 -37년간 회사를 경영하면서 다른 제품 없이 비료에만 전념했다. 비료는 어떤 의미인가?
 "한마디로 징그러운 파트너이다. 알다시피 비료가 고약한 냄새가 많이 난다. 이는 지역 주민 뿐 아니라 본인과 회사 직원들에게도 힘든 일이다. 하지만 `사람에게 좋은 것은 농작물에도 좋고 토양에게도 좋다`는 생각을 가지고 자부심을 느끼며 유기농비료를 연구ㆍ생산 해왔다. 이제는 내 인생의 전부가 됐다.
 84년에 장림에 오면서 동아대와 산학협동을 시작해 2005년에는 연구소를 만들어 미생물 비료를 생산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또한 지속 가능한 경영을 하기 위해서는 연구 개발이 지속적으로 돼야 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경영해 오면서 가장 기뻤던 적은 언제인가?
 똑같은 땅의 조건이지만 어떤 비료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수확량이 달라진다. 농부가 농사를 짓기는 하지만 그 토양에 알맞은 비료를 사용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오랜 습관과 전통 때문에 좋은 비료인줄 알면서 바꾸려고 잘 하지 않는다. 그러나 한번 써본 사람이거나 전문가 이야기를 듣는 사람은 우리 회사의 비료를 찾는다.
 농사짓는 사람이 우리 회사 비료를 사용해 결과에 만족할 때 뿌듯하다. 그리고 그 사람이 진심으로 우리 회사를 고마워할 때 기쁨을 느낀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최선을 다해 노하우를 알려주곤 한다. 반면 우리 제품을 만족해하지 못하거나 자신이 비료 사용법을 잘못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회사의 제품을 만족해하지 못할 때는 힘이 들기도 한다."
 -자신만의 경영철학이나 신념이 있나?
 어려운 경우를 여러 번 경험하였지만 어떤 시련이 왔을 때 회피하고 도망가는 것 보다는 뚫고 나가겠다는 생각이 강하다. 힘들어도 다 지나간다. 얼마나 현명하게 대처하느냐의 문제인데 그동안의 경험으로 볼 때 성실히 대하고 정직하게 만들면 다 통하는 것 같더라, 그래서 늘 `성실하고 정직하게 살자`고 다짐하곤 한다. 조금은 식상한 말이 될 수도 있지만 저의 성격과 가장 잘 부합하는 이야기인 것 같다. 현재 한국여성 경제인 협회 부회장과 경남지회 회장을 맡고 있는데 그러한 자리에서 일 처리를 할 때도 늘 개인적인 이해관계보다는 단체의 목적과 구성원들의 이익을 더 먼저 생각하면서 운영해오고 있다.
 IMF때 회사를 정리하려는 생각을 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유기농비료 1호로서 지금 포기하면 국가의 손해라는 생각을 가지고 버텼다. 나의 비료가 생산되지 않아 금전적 손해가 아닌 우리나라 농산물 재배에 피해가 갈 것이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
 "유기농비료를 정말 확실히 정착시키고 싶다. 아무리 유기농이 좋다고 노래를 불러도 농민들이 금전적인 문제나 그동안 습관적으로 사용해온 것을 바꾼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문제다. 그러나 농민들의 관심을 환경적인 문제에 대해 가질수 있게 하고 또한 지방자치단체에서도 먹거리 문제는 우리 시민들의 건강한 삶의 문제로 접근하면 쉽게 해결 될 수 있다. 화학비료를 전혀 쓰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어느 정도 균형을 맞춰 함께 사용을 해야 된다.
 다음세대는 실패를 반복하지 않도록 꾸준히 제품을 개발하고 그동안 느낀 경험과 노하우를 전하고 싶다. 누가 또 이 길을 가고자 할 때 반드시 이겨내야 할 것 들이 있는데 나의 소중한 재산을 그들과 함께 하고 싶다.
 -마지막으로 한마디 한다면.
 "향후에 유럽 등으로 수출을 해보고 싶다. 물론 문화가 다르고 규제하는 조건이 달라 어려울 수 있지만 꾸준히 공부하고 꿈을 꾸는 이상 불가능은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일에 김해시가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지원해주면 좋겠다. 김해는 도농복합 도시이다. 농약을 훨씬 줄이고도 농사를 잘 지을 수 있다는 믿음 속에서 김해가 이러한 모범도시로서 역할을 잘해 준다면 좋은 성공 사례가 돼 세계로 나가는데 별 문제가 없을 것 같다. 농작물이 건강해지고 국민들의 식단이 건강해지면 결국엔 우리나라가 건강해질 것이다. 그런 날을 꿈꿔 본다."

 ▲원종하 교수는 누구
 경제전문가이며 인제대학교 국제경상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지역의 인재와 대학 그리고 지역경제를 연결하는 메커니즘을 만들기 위해 지난 97년부터 산학관 협동에 관심을 갖고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지역기업체의 경쟁력 제고를 위해 2007년 김해기업연구소를 창립, 현재는 고문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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