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18:27 (토)
노인들
노인들
  • 김루어
  • 승인 2012.12.13 18:47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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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해가 지는 서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을 색으로 표현하면, 당연히 회색이 된다.

 내 일상은 정형화 되어 있을 만큼 지극히 단조롭다. 아침에 일어나면 습관처럼 세면을 하고는, 반사적으로 주방으로 향하면서, 자신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인간의 삶 또한 파블로프의 개와 별로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하지만 아침을 준비하지 않을 수는 없다, 먹지 않고 살 수 있는 인간은 없으므로.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청소차가 오기 전에 생활쓰레기를 내놓는 일이 먼저였다. 보통은 저녁에 내놓지만 언제부터인가, 초저녁잠에 빠져드는 일이 잦아져, 아침에 내놓는 경우가 많아졌다.
 밖은 이빨이 부딪힐 정도의 한파였다. 여명조차 없는 신새벽이었지만 골목길은 며칠 전 내린 눈으로 희끗했다. 그 퀭하니 빈, 인적하나 없는, 공간을 한파만이 휘젓고 있었다. 지정된 장소에 쓰레기를 버리고 서둘러 돌아오는데, 문득 이 적요한 시간에 내 발자국을 묻는 기척이 있어, 본능적으로 몸을 돌렸다. 저 아래 조금 전에 내가 버린 쓰레기를, 남루한 입성을 한 작은 할머니가 리어카를 옆에 세워 놓고 뒤지고 있었다. 발이 땅에 달라붙은 듯 한동안 서 있었다, 일 갑자 가까이 살아왔으면 비상(非常)한 풍경만도 아닐터인데…… 
   아이들을 출근시키고 책상 앞에 앉았다. 그러나 써야 할 원고에 정신이 모아지지가 않았다. 새벽에 본 그 할머니 때문이었다. 사회문제에 어섯눈을 뜬 스무살 운동권 대학생도 아닌데 아직도 나는 가끔, 내가 걷어낼 수도 없는 어둠을 생각할 때가 있다. 과대망상이거나 병이다. 기분을 전환하기위해 햇살이 들어오기 시작하는 베란다로, 한파 때문에 거실에 옮겨 놓았던, 화분들을 옮겨 놓고 창밖을 본다. 도심에 있는 주택가이어서인지 길은 행인들로 붐빈다. 물론 그 할머니는 보이지 않는다.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행인들 입성의 색상은 다양하고 화려하기까지 하다. 젊은 층으로 내려갈수록 입성은 원색에 가깝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젊은 층, 그렇다 그들을 색으로 표현하면 원색일터이다. 그들은 창조적이고 미래지향적이고 역동적이고 뜨겁다. 그들은, 정치판과 경제판 또는 문화계를 포함한 어떤 영역에서든, 생산이나 소비의 중심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그들은 너무나 역동적이어서 데파트나 커피숍, 쇼핑센터, 영화관등 우리주변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 그렇다. 세상은 젊고 강한, 그들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중심에는 그야말로 그들만으로 넘쳐난다. 그러나 중심부에서 주변부로 갈수록, 해가 서쪽으로 기울수록 그러하듯이, 색상은 흐려지고 어두워진다.
 하지만, 흐리고 어두운 그 주변부에도 일군의 군상들이 있다. 노인들이다. 그들은 해가 지는 서쪽으로 걸어가고 있다. 그래서 그들을 색으로 표현하면, 당연히 회색이 된다. 그들은 퇴영적이고 과거 지향적이고 정적이어서 누구의 눈에도 시들어 보인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정치판과 경제판 또는 문화계를 포함한 어떤 영역에서도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들의 경험은 중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을 보려면 경로당이나 양로원, 역 앞이나 공원양지에 가야한다. 물론 거기에도 끼이지 못하는 더 소외된 회색군상들도 있다, 새벽에 본 그 할머니같은……
 회색. 회색은 한때 불꽃으로 타올랐다 남은, 재와 같은 색이다. 그렇다, 그들은 내부의 불씨를 다 연소시킨 재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잊고 있다. 우리 또한 언젠가 그들처럼 재가 된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는 더욱 상기할 필요가 있다. 비록 그 불꽃이 크고 작았던 차이는 있었을지언정 우리를, 이 세상을 한때나마 데우고 밝힌 이들이 그들임을. 따라서 당연히 손자손녀들 손에 이끌려 데파트나 커피숍, 쇼핑센터,
영화관에 갈 자격이 있는 이들이 그들임을.
 연애대장 독일시인 릴케를 감상적이라 하여 싫어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나는 다음에 인용하는 시의 일부만으로도 릴케를 사랑한다. 「우리 모두가 떨어집니다 이 손도 떨어집니다 다른 것을 보십시오 떨어짐은 어디에나 있지요. 하지만 이 떨어짐을 부드러운 손으로 끝없이 맞아 주는 누군가가 계십니다」 이 시에서 말하는 그 「누군가」가 저를 포함한 당신들이었으면 좋겠다, 최소한 이 겨울만이라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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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동기 2013-04-13 00:30:59
김루어 시인님의 단아한 글빛에 취하며, 퍼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