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22:09 (금)
우리, 겨울나무처럼
우리, 겨울나무처럼
  • 김루어
  • 승인 2012.12.06 20:06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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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루어의 아침을 여는 시선

   어느새 다사다난했던 임진년도 저물어 가는 십이월이다. 십이월은 이런저런 모임과 약속이 많은 때다. 아마도 한해를 정리하는 마지막 달이어서이리라. 나 또한 그 사정은 남다르지 않아서 이런저런 약속과 모임 때문에, 붙박이처럼 지키던 책상 앞을 떠나 밖으로 나가야 하는 약속이 상대적으로 많은 달이다. 하지만 십이월에 모임이나 약속이 있으면 나는 평소보다 한 시간쯤 일찍 집을 나선다. 잎을 잃고 신음하며 겨울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가로수들과 동행하며 잠시나마 나 자신을 반추하고 싶기 때문이다. 내 삶이 비록 봄에 피는 꽃처럼 여름에 만개하지는 못했지만, 바람에 잎을 잃고 추위에 가지를 떠는 겨울나무, 잠시나마 그들의 벗이 되어 나 또한 그들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음미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꽃보다 나무를 더 좋아했다. 어린 소견에도 나무가 꽃보다 더 인간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혹자는 제자리에 못 박혀 움직이지 못하는 나무와 인간은 다르다고 말하지만, 현실이라는 자리에 못 박혀 벗어나지 못하기는 인간도 나무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렇다. 나무도 인간들처럼, 세월의 장단의 차이는 있지만, 태어나고 자라고 늙고 그리고는 병들어 언젠가는 죽는, 생로병사의 철리 속에 서 있기는 인간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같은 점은 또 있다. 그들 또한 인간들처럼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변하고 끊임없이 새로워지려고 몸부림친다. 변하지 않고 새로워지지 않으면, 숨을 쉬고 있어도 죽은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물론 변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소나무나 히말라야시다나 사철나무 같은 상록수가 없지는 않지만, 그들 또한 길게 보면 잎만 상록일 뿐 끊임없이 변하고 있어 전술한 철리에서는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상록수를 제외한, 도심에 조경으로 심은 가로수나 산야의 나무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변화가 가장 원색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그들의 잎이어서 대개 구월이면 엽록소를 잃고 노랑이나 빨강으로 물들고 시월이면 벌써 지기 시작한다. 그들의 원색이 자극적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탓일까. 사람들은 노랑이나 빨강으로 물든, 소위 말하는 한창인 단풍을 좋아한다. 그리고 인생에 빗된다. 그렇다! 낙엽탄을 쓴 호머(Homer)나 제망매가를 노래한 월명사(月明師)이래로, 낙엽은 인생에 빗돼져 왔고 나 또한 그들에게 공감해, 젊은 시절엔 낙엽을 주워 책갈피에 끼워뒀다가 세월이 흐른 뒤에 우연히 발견하고 눈물을 찔끔거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쉰이 제법 넘은 지금은 보다 분명히 알게 됐다. 지금은 나는 월명사가 노래하는 `이에 저에 떠딜 닢`이 인생이 아니고, 그 잎을 떨어뜨리는 나무가 생로병사라는 철로(哲路)를 걷고 있는 우리의 삶에 보다 가까움을. 그렇다! 나무가 인간이면, 잎은 우리 인간에 비하면 옷이다. 옷은 때가 되면 낡고, 낡으

면 벗어야 한다. 특히 마음의 낡은 옷은 더욱 그러하다. 겨울은 나무가 새 옷을 갈아입기 위해 낡은 옷을 벗는 때다. 겨울이면 우리 인간들은, 물론 인간이 탈피하기 어려운 생물학적인 약점 때문이겠지만, 나무와 달리 켜켜이 옷을 껴입는다. 하지만 죽을 때까지, 끊임없이 자라고 끊임없이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마음의 낡은 옷만은 훌훌 벗어 던져야 한다. 삭풍에 떨고 있으면서도 지난여름의 은성(殷盛)을 아쉬워하지 않고 다가올 겨울의 혹한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늠연히 서 있는, 우리들의 벗인 십이월의 저 나무들처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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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동기 2013-03-11 00:07:14
우리 문학카페에 좀 퍼갑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