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3 18:57 (화)
"고문, 아무리 당해도 익숙해지지 않아"
"고문, 아무리 당해도 익숙해지지 않아"
  • 연합뉴스
  • 승인 2012.11.06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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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상, 영화 `남영동1985`서 고문당하는 민주화 운동가 연기
"고문을 실제 경험한 분들 얘기를 들어보면 고문은 당하고 또 당해도 익숙해질 수 없는 것이라고 했는데, 영화를 찍으며 그 말에 공감했습니다."

영화 '남영동1985'에서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끔찍한 고문을 당하는 민주화 운동가 '김종태'를 연기한 배우 박원상(42)은 영화를 찍으며 그런 생각을 가장 많이 했다고 떠올렸다.

이 영화는 고(故) 김근태 민주당 상임고문의 자전적 수기 '남영동'을 바탕으로 1985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벌어진 22일간의 잔인한 고문 기록을 담고 있다.

영화에서 이름이 바뀌긴 했지만, 주인공은 고 김근태 고문처럼 민주화 운동을 하다가 잠시 쉬고 있던 사이 영문도 모른 채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와 북한의 지령을 받았다는 자백을 강요당하며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고문을 받는다.

이 고문의 기록을 영화화하면서 배우 박원상 역시 비슷한 강도의 고문을 실제로 받아야 했다. 칠성판(고문을 위해 사람을 올려놓을 수 있도록 만든 나무판)위에 누워 사지를 결박당하고 얼굴 위에는 거즈가 올려진 채 주전자로 들이붓는 물이 콧구멍 속으로 흘러들어와 숨을 쉴 수가 없는 상태를 1분 가까이 견뎌야 했다.

오는 22일 개봉을 앞두고 6일 종로구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촬영 과정에서의 고생담을 생생히 전했다.

 

"영화 촬영인데도 칠성판에 묶이는 순간 심리가 막막해집니다. 내 의지로 할 수 있는 게 없어지니까요. 심리적으로 답답하니까 갑자기 콧등이 간지럽다든가 하는 느낌도 있고요. 얼굴에 거즈를 올려놓으니까 다른 배우들 얼굴도 안 보이죠. 그 상태에서 얼굴 위로 물이 쏟아지면 말도 할 수가 없게 됩니다. '버틸 수 있는 만큼 버티다 정 못 버티겠는 순간에 최대한 발버둥치겠다, 그걸 신호로 멈추자'고 약속을 하고 고문을 시작하는데 다른 배우들이 보기에는 제 반응이 연기인지 진짜 죽겠다는 건지 구분을 잘 못해서 처음엔 정말 한계 상황까지 도달한 경우가 많았어요. 그때마다 몸이 회복하는 데 한참 걸리곤 했죠."

다행히 촬영이 진행될수록 고문하는 배우들이나 당하는 쪽이나 조금씩 적응을 해나갔다고 했다.

"우리가 촬영한 장면들을 모니터링하면서 시간을 재보니 평균적으로 35-40초 정도는 참을 수 있더라고요. 그 정도로 시작해서 점점 초수를 늘려갔죠. 마지막 고춧가루 물고문 장면은 롱테이크가 필요했는데 우리는 나름대로 터득한 요령으로 간신히 찍었지만, 실제 그런 걸 경험한 분들은 도대체 어떻게 버텼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어렸을 때 강물에 빠져 죽을 뻔했던 경험으로 물 공포증을 갖고 있어 초반 촬영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다.

"연극을 오래 하면서 호흡과 발성 훈련이 잘돼 있는 편이라 물고문 역시 호흡으로 어떻게 해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첫 촬영에서 얼굴에 물이 뿌려지는 순간 어릴 때 트라우마가 몸을 경직되게 하더라고요. 코에만 물이 안 들어가면 버텨보겠다고 했더니 최대한 입 쪽으로 뿌리면서 적응해 나가기 시작했죠. 촬영이 다 끝나고 나서 가족들과 간 여행에서 30년 만에 처음으로 수영장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영화에는 그가 참혹한 고문을 당한 뒤 칠성판 위에 누워있는 장면이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시점으로 한 장면 등장한다. 이 장면에서 전라의 몸이 노출된다.

"그런 고문을 당하는 상태에서 뭔가를 걸치고 있다는 것도 부자연스럽지만 등급 문제도 있고 관객 정서상 받아들일 수 있는 수위를 고민해야 한다고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장면은 꼭 필요하다고 봤어요. 그래서 감독님이 부감샷(카메라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촬영방법)이 필요하다고 말씀하셨을 때 '안 그래도 언제 찍나 생각했다. 괜찮다'고 했어요. 처음에는 사람들 앞에서 옷을 벗는다는 게 익숙하지가 않았지만, 촬영 회차를 거듭할수록 벗는 것에 익숙해져서 다 벗고 찍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죠. 칠성판 위에 고깃덩어리로, 사람으로서 요만큼의 가치도 남지 않고 갈기갈기 찢긴 채 살덩어리만 남아있는 상태를 보여준 겁니다. 완성된 영화를 보니 잘 찍은 장면이고 꼭 필요한 장면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는 이 영화를 위해 몸무게를 10㎏ 이상 감량했고 고문 장면 촬영 때에는 밥도 거의 먹지 않았다.

"촬영하면서 영화 속 상황과 비슷한 조건을 만드는 게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물고문 장면이나 노출 장면을 찍을 때에는 촬영장에서 밥을 안 먹었는데 다른 배우들과 스태프가 자꾸 밥을 먹으라고 하니까 나중엔 짜증을 내기도 했어요. 고 김근태 의원의 수기를 보면 그 안에서 가장 미웠던 게 FM라디오 아나운서의 밝은 목소리였다는 얘기가 있는데 저도 다른 배우들이 옆에서 시시덕거리며 밥 먹는 모습을 보면서 어찌나 밉던지요(웃음). 고문 장면 촬영이 다 끝나고 다 같이 밥을 먹는데 그 기분이 얼마나 좋았는지 모릅니다."

 

 

 

그는 영화가 개봉되면 열두 살짜리 큰아들과 손잡고 함께 가서 볼 거라고 했다.

"관람 등급이 15세 관람가로 나온 게 고맙고 반갑습니다. 어린 친구들도 이 영화를 많이 봤으면 좋겠어요. 저는 이 영화를 '기억에 관한 영화'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왜 자꾸 뒤돌아보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지만, 뒤를 돌아보는 게 불필요한 게 절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과거와 기억은 현재, 미래와 실처럼 이어져 있어서 우리가 더 좋은 미래로 가고자 한다면 힘들고 불편한 기억도 가지고 있어야 하고 자꾸 되새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지영 감독의 전작 '부러진 화살'이 사회적인 이야기를 코믹한 에피소드와 버무려 대중성이 컸던 데 비해 이번엔 무거운 이야기를 직선으로 풀어놓은 영화여서 홍보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

"이 힘든 영화를 관객 분들이 잘 버텨주실까, 힘들다는 생각으로 외면하면 어쩌나 지금도 사실 고민이 커요. 그래서 제가 어떤 식으로, 어떤 마음과 태도로 영화에 대해 얘기해야 할지 딱히 잡히지가 않아요. 영화가 직선인데 '곡선도 있어요' 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냥 느낀 그대로 솔직하게 다가가서 설득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냥 진심으로 가보는 수밖에 없겠구나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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