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쌍할 수밖에 없는 민족.
한적한 새벽, 삼랑진ㆍ진영ㆍ진례를 스쳐 두 시간쯤 달려온 백지한은 창원과 진해를 가로지르는 고개에 차를 세웠다 그가 어릴 적 즐겨 찾던 안민고개다. 다정한 풍경이었다. 꿈속에서도 자주 만나던 바로 그곳이다. 차에서 내린 그는 밤 새운 서리가 차가운 풀밭에 엉덩이를 놓고 앉았다. 그리고 아침노을을 향해 담배연기를 뿜었다.
`결국 이렇게 빚만 잔뜩 안고 돌아오다니….`
새벽운무를 따라 장복산 허리를 감고 도는 바닷바람이 찼다.
처음부터 파산은 예정돼 있었다. 서구 신식민지 문화인 방송매체를 신처럼 섬기고 있는 오늘의 한국인들이 그의 책을 볼 리가 없었다. 그가 전 재산을 끌어대고 사채와 금융채를 빌려다가 끝까지 버텼던 도서출판 `개혁` …….
그러나 이 민족이 화합ㆍ번영하는데 저해가 되는 요인들을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국가의 바른 기틀을 세우려 혼신을 다했던 그 출판사는 어이없게도 대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갈수록 민초들의 의식이 날라리화 되고 지도자들은 더욱 부패해짐으로써 판매 부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던 것이다.
그는 결국 그를 빚더미에 오르게 한 `개혁`의 가동을 중단할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경매 처분된 집에서 쫓겨났고 말았던 것이다.
`애들은 잘 있는지…….`
그 동안 세상 어려움을 모르고 집안 일만 해온 아내와 어린 두 자식에 대한 그리움이 눈물 속에 솟구쳤다.
외로웠고 추억만 그리웠다.
이제 그에게 남은 건 아내와 두 자식, 그리고 몇몇 친구 뿐…….
모두 떠나갔다.
낙엽은 뒹굴고 가슴이 운다. 아침 햇살에 비친 그의 안색이 처참해지고 있었다. 백지한은 소리 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않고 고향 앞바다를 내려다보았다.
`역시 멍청한 짓인가?`
영봉을 만나 다소 힘을 얻고 오는 길이었지만 고향을 찾은 그의 마음은 다시 회한으로 가득차 있었다.
`불쌍한 나라…….`
존경하고 받들만한 어른이 없어진 나라.
아니 텔레비전 속에 나오는 탤런트, 가수, 개그맨들을 비롯한 연예인이 어른이 되버린 나라.
가장 큰 어른이라고 해야할 대통령부터가 도둑놈이고 사기꾼이고 살인자인 나라.
천신(天神) 환인이 이 나라를 연 환기(桓紀)도 있고 단군이 개국한 단기(檀紀)도 있건만, 굳이 서기(西紀)를 사용하는 비굴한 나라.
`불쌍한 정부…….`
미군들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껌을 달라고 조르는 아이들.
물레방아 도는 방앗간에서 미군에게 몸을 주는 한국 처녀.
그런 굴욕적인 영화가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둔갑돼 미국과 일본의 무슨 영화 단체에서 얼씨구나 상을 주니, 칸영화제에도 가라, 도쿄도 가라, 몬트리올도 가라며 홍보물도 찍어주고 돈도 주었던 배알 없는 정부.
실컷 국민들의 혈세(血稅)로 키워준 재벌이 국가를 파멸의 나락으로 끌어가고 있는데도 칼 한번 들이대지 못하고 그 재벌과 오히려 공생하는 정부.
단 며칠간에 걸친 어업 협상으로 중소기업 오만 개에 해당하는 황금어장을 일본에 내주고도, 줄 것 주고 받을 것 다 받은 최선을 다한 협상이었다고 국민들과 어민들을 회유하는 철면피한 정부.
국토의 대부분인 산은 잡목림으로 팽개친 채, 환경의 보고인 갯벌은 매년 없애고 있는 무분별한 정부.
이 조그만 국토에 무에 그리 필요하다고 고속전철을 들여와 수십조에 달하는 국민의 혈세를 낭비하는 계획성이라고는 없는 정부.
`불쌍한 민족…….`
그러한 정부가 이끄는 나라에 태어나 불쌍할 수밖에 없는 민족.
침략국에 의해서 꾸며진 나약하기 그지없는 가까운 과거역사에만 집착하고 있을 뿐, 아름답고도 강했던 먼 과거(뿌리)에 대해서는 알지도, 알려고도 하지 않고 있는 민족.
따라서 역사책으로만 본다면 단 한번도 행복한 적이 없었던, 불행한 과거만을 가진 민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