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이 어찌 계신다 하겠는가?"
숨을 죽인 채 20여 명 스님들의 일사불란한 발원을 경청하고 있는 백지한의 온몸에 거대한 전율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의 전율은 슨님들의 경건한 청음뿐이 아니라 그들이 지심으로 비는 국가태평에 대한 발원에 기인하고 있었다.
그 발원엔 주지 영봉의 강력한 신념이 담겨 있다. 대저 나라가 망하고, 백성이 흩어지고 굶주린다면 부처는 누가 모시고 절이 무슨 소용이냔 게 그의 지론이었다.
백지한의 목구멍으로 더운 침이 삼켜졌다.
부귀영화를 헌신짝 버리듯 법복을 벗어 던진 영봉.
그리고 버려지는 노인들을 돌보고 있는 그는 이 시대의 진정한 기인(奇人)이자 고승(高僧)이었다. 점점 왜소해지는 국가와 백성들을 절망과 패배의식으로부터 깨우치려는 숭고한 연민의 소유자…….
백지한의 목젖이 다시 한번 뜨겁게 울컥거렸다.
뭉클한 마음으로 법당을 나서니 연속되는 기도를 위해 좀처럼 나서지 않는 영봉이 따라나왔다.
백지한이 놀라 손을 저었다.
"내 신경 쓰지 말고 들어가게."
"왜? 가려고? 이 밤에?"
영봉이 서운한 눈빛을 보냈다.
"음."
백지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왜 그리 급하게 갈려고 그러나? 며칠 쉬었다 가게."
"폐 끼치고 싶지 않네."
"폐라니?"
영봉이 맑은 이마를 두 줄 접었다.
"친구 집에 와서……."
"스님 혼자만의 절집이 아니잖은가?"
백지한이 웃으며 걸망을 왼손으로 바꿔들었다.
"거 참, 고집도."
영봉이 더 이상 말리지 못하고 물었다.
"어디로 가나?"
"모처럼 고향엘 들르고 싶네."
두 사람의 고향은 경남 진해였다.
고향이라고 해야 찾아갈 부모도 형제도 없었지만, 시름에 잠길 때마다 그래도 가장 생각나는 곳이 고향이었다.
백지한이 덧붙였다.
"가는 길에 속가 모친께 안부 전해 올리겠네."
"고맙네."
고개를 끄덕이던 영봉이 불쑥 물었다.
"언제 올 건가?"
"그걸 지금 내가 기약할 수 있겠나."
"그래. 그렇겠지."
"……."
"몸조심하고, 부도난 일은 일단 잊어버리게. 이제 와서 지난 일 돌이킨들 무슨 소용인가."
"나도 그러고 싶지만 쉽지가 않네."
영봉이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친구에 대한 애정이 섞인 한숨이다.
"아무튼 자네가 재기하도록 내 힘껏 도울 테니 푹 쉬었다 오게나."
"……?"
"하는 일이 어려워질 땐 자신감과 확신을 축적할 수 있는 여가를 갖는 것도 괜찮아."
"……."
"자넨 재기할 수 있을 걸세."
"아직도 부처님께선 나 같은 놈을 거두어 주실는지……?"
백지한의 목이 잠겼고 영봉이 결론처럼 말을 이었다.
"자네 같은 사람에게 부처님의 빛이 가지 않는다면 시방에 부처님이 어찌 계신다 하겠는가?… 친구는 외롭지 않고 부처님은 곳곳에 있는 법이지."
"……!"
백지한이 영봉을 바라보았다. 그의 코 끝이 울고 있었다.
영봉이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든 오게."
"그려, … 어쨌든 스님한텐 고맙다는 말밖엔 할 말이 없군."
"내가 할 소릴, 이렇게 찾아주는 자네가 오히려 고맙지."
"잘 있게."
백지한은 도망치듯 몸을 돌렸다.
"며칠 쉬었다 가면 좀 좋겠나……."
영봉의 물기 젖은 목소리가 그의 뒤꼭지를 축축이 적시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