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권이 무참히 짓밟히는 이 나라에서?`
"그 강을 건너면 곧 열반의 언덕에 도달할 걸세."
백지한이 심호흡을 하며 침묵을 깼다.
"열반의 언덕?"
"그래. 이 조각난 국가에 사는 백성들이 절망과 패배의 강을 건너 도달할 그 언덕."
영봉의 말꼬리에 힘이 뭉쳐있었다. 영봉이 말을 이었다.
"내 도와줌세. 그러니 새로이 시작하게."
백지한이 깊은 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가슴에 깊이 담듯 말했다.
"말이라도 고맙네."
오랜만에 만난 두 친우의 얘기는 끝이 없었다.
이후 녹차 따르는 소리가 예닐곱 번 반복해 들린 뒤에도 그들의 얘기는 주지실을 둘러싼 단목 사이로 끊이지 않고 흘러나왔다.
영봉과 백지한은 다소 특이한 인물들이었다. 그 중 영봉은 대학을 졸업하고 2년간 판사생활을 했다. 그러나,
`누가 누구를 단죄한단 말인가?`
`인간이 인간을?`
`더욱이 인권이 무참히 짓밟히는 이 나라에서?`
그 번뇌와 함께 법복을 벗어 던졌던 그였다.
그 결단의 한 가운데에는 중생심(衆生心)이 자리잡고 있었다.
부처의 본 마음, 즉 불교 근원은 중생심이다.
분진이 쏟아지는 갱에서, 고막을 찢는 듯한 공장 안에서, 망망한 대해(大海)에서, 햇빛이 쨍쨍 내리쬐는 들판에서도, 자신의 일에 보람을 느끼고 자연의 축복에 감동할 줄 아는 중생들….
그 중생들에 대한 존경과 애정이 바로 부처, 불보살인 것이다.
스님이 돼서도 영봉의 반골ㆍ진보적인 성격은 그대로 나타났다.
참선과 화두에 매달려 허구한 날을 허비하고 있는 비구종을 버리고, 법화경과 천부경을 소의경전으로 해서 현실의 간난(艱難)과 치열하게 싸우는 천부ㆍ법화도량에 입문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중생심에 따라 휘황찬란한 절 건물보다는 경로당 건물을 해마다 늘려가고 있는 것이다.
한편 백지한은 도서출판 `개혁`의 발행인이었다.
개혁….
개혁이란 하나의 집단을 한 발 앞선 곳으로 이끄는 것.
그래서 그 과정은 고달프다.
부정부패를 덮고, 비리를 베고, 뇌물을 안고 자며 현실의 열락에 안주하려는 특정의 적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백지한의 개혁이 그 동안 발행한 책들을 잠시 보자.
고구려의 웅혼한 기상과 대국의 면면을 가졌던 우리 민족의 뿌리와 혼을 국민들에게 일깨워주고자 펴냈던 소설 `태환국인`.
재벌ㆍ국회의원ㆍ검판변호사ㆍ고급공무원ㆍ정치성향의 군장성ㆍ장차관ㆍ언론인의 일곱 집단을, 민중을 등쳐먹고 나라를 망쳐먹는 개혁 대상으로 내몬 `칠적`(七賊).
고구려 이전 한국의 고대사를 밀도 있게 탐구한 `한국 상고사의 진실`.
실질적으로 국가를 이끌어 가는 4대 권력기관인 국가안전기획부ㆍ검찰청ㆍ국세청ㆍ경찰청, 이 네 기관의 직원들이 건국이래 민초들에게 갈취해 간 돈만 고스란히 게워놓는다 하더라도, 지금 당장 일본을 앞지르고도 남을 것이라고 분석한 `四大盜賊`(사대도적).
`민족 고유의 전통과 뿌리에 기반을 둔 보편적 가치가 사라져버린 채, 그저 중국에서 빌려오고, 미국에서 구걸해오고, 일본에서 몰래 훔쳐온 자신의 몸에 맞지 않은 사상과 종교와 문화가 헤매고 있는 서울의 거리를 직시한 글, `기형(奇形)의 한국문화`.
군사정권의 비도덕성과 폭력성을 고발한 `전환기의 시련`.
백지한이 발행한 책들은 대충 이와 같아서 민초들의 가슴에는 불을 지핀 반면, 기득권자들은 순식간에 거의 모두 그의 적이 돼버렸다.
"백지한 이놈! 너무나 무도하다."
"범 무서운 줄 모르고 날뛰는 하룻 강아지!"
본래 의롭지 못한 자들은 악한 일에는 뜻을 합치는 법.
30년 이상 정치를 독점해 온 정치 모리배들, 개발경제수단으로 독재정부가 정책적으로 키워온 독점재벌기업들, 또한 수구적 지식인, 여전히 뇌물과 비리에 탐착해 있는 공무원들이 한마디씩하며 이를 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