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당황해 한 마디 하자 진혁형은 이번엔 그가 안주를 하나 집어서 내 입에 살짝 넣어주었다.
"이제 됐나요?"
아무리 쇼라고는 해도 처음 만나 서로를 송두리채 나눈만큼 어색했던 느낌은 이런 `안주 먹여주기`로 조금 풀렸다.
"지누의 얘기가 듣구 싶네! 새내기인데 어떻게 이런 세계를 알게 됐나요?"
"글쎄! 그게요… !"
하다가 나는 말을 멈췄다. 너무나 미묘했던 그 경험을 얼른 표현해 낼 수가 없어서였다. 일제 강점기가 36년이라면 난 초중고 12년을 부모님과 선생님들한테 압박당했다. 그리고 대학에 들어가서야 그 노예같은 생활에서 풀려났던 것이다. 나는 당연히 각종 동아리의 신입생 회원이 되기 위해 드넓은 캠퍼스를 누비고 다녔다. 그리고 그 중에 교내 방송국 아나운서부에 지원해서 어려운 1차 필기시험과 2차 실기시험 그리고 3차 면접의 관문을 무사히 통과했다. 합격을 확인하고서 처음 방송국에 찾아가던 때였다.
"어이! 강지누! 축하한다!"
누군가 뒤에서 이렇게 소리쳐 돌아보니 낯선 얼굴이었다.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니까 사뭇 화난 투로 건네왔다.
"너를 뽑은 방송국 선배를 몰라봐? 2차 카메라 테스트때랑 3차 면접까지 내가심사했잖아?"
"아! 네! 선배님… ?!"
그때 아나운서부에 지원한 나는 아나운서국장이라는 선배의 각별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처음부터 아주 강렬한 눈빛으로 나를 주시했던 것이다. 그리고 스튜디오에서 비디오테스트를 마치고 나오자, 그가 내게 슬며시 다가와서 속삭이듯 한 마디 던지고 갔다.
"너를 나의 세자로 책봉한다!"
나는 그 순간을 떠올리며 얼른 미소띈 얼굴로 인사를 했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열심히 하겠슴다!"
"그래! 합격 신고하러 방송국 가는 길이지? 함께 가자!"
그러면서 아나운서국장 선배는 난처하게도 슬쩍 나의 손을 잡은 채 함께 걸었다. 해서 나는 마치 그의 커플처럼 끌려갔는데, 방송국 동아리실에 들어서자 더욱 황당스런 소리를 들어야 했다. 코믹하게 보이는 뿔테 안경의 고참인듯한 방송국원이 이렇게 소리쳤던 것이다.
"어이! 너무 진도 빠른 것 아냐? 아직 입단식도 안한 신참을 벌써부터 손잡고 다니니… !"
"흥! 내 새끼 데리고 오는데 웬 질투씩이나?"
하지만 아나운서국장 태환선배는 호탕하게 웃으면서 나의 손을 크게 흔들어 보였다. 그제야 나는 수줍게 그의 손을 뿌리치면서 얼른 고개숙여 인사를 했다.
시집살이의 고통속에 한달쯤 지나고나서야 정식으로 신입국원 환영회가 열렸다.
"자! 오늘밤이 진짜로 신입국원으로 살아남느냐 사라지느냐 결판이 난다!"
방송국장이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선언했다. 그리고 인솔돼 따라간 곳은 캠퍼스 후문에서 가까운 지하호프집 <양산박>이었다.
"자! 그럼 지금부터 먼저 사발식을 거행한다! 모두 `수호전`에 나오는 영웅호걸들처럼 원샷으로 마신다! 알겠나?"
"넷! 알겠슴다!"
이윽고 몇 차례의 술잔이 돌아가서 제법 취기가 올랐을때 너무 힘이 빠진 탓인지 갑자기 `양산박`이 `타이타닉`으로 바뀐듯 마구 흔들리면서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비틀비틀 쓰러지자 여기저기서 소리질렀다.
"어어? 저 짜슥 왜 저래?"
"주는대로 마셔대더라니… !"
"누가 술깨는 약이라두 사오라구… !"
아득한 메아리 속에 나는 어딘가로 옮겨지는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을까? 내가 눈을 떴을 때 그곳은 너무나 낯설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