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갯불에 콩구워 먹듯 정신없이 돌아가던 한해도 저물어가는 12월의 어느날이었다. 로드매니저 미스터 마발과 함께 나타난 박홍보 이사가 역시 은밀히 그녀에게 건네오는 말이었다.
"바로 우리 사장님의 대학동창이라니까 VIP라고 해야겠지? 그분이 다음 총선에 공천을 따려고 실세의 정치인과 만나는 접대 자리래!"
그리하여 하이나는 아직 개발붐을 타지 않은 정릉 골짜기 커다란 한옥집으로 안내됐다. 마침 첫눈이 온 천지를 하얗게 색칠해, 마치 한폭의 동양화처럼 고즈넉한 풍경이었다.
"여기가 한때 거물 정치인들이 드나들던 마지막 남은 비밀요정이라고 하더라. 오늘은 춘향이가 이몽룡을 꼬시던 방법으로 하면 되지 않을까? 하하!"
미스터 마발의 농담에 하이나가 재치있게 대꾸했다.
"지금 만날 고객은 변사또 아녜요? 호호"
이윽고 경비원인듯한 아저씨가 나와 약속된 장소로 안내했다. 마치 사극에 등장하는 중전마마 침전처럼 기품이 있으면서도 화려하게 꾸며진 방에는 70대 노정객과 사업가로 돈벼락을 맞아 이젠 권력의 칼마저 거머쥐려는 욕망의 화신처럼 보이는 40대 사나이가 이미 거나하게 취한듯 호탕한 웃음을 터뜨리며 하이나를 맞았다.
"하하하! 어서 와요! 조대박 동창 친구가 데리고 있다는 아가씬가? 참 이름이 뭐랬더라?"
40대 사나이가 흡사 조폭처럼 우렁찬 목소리로 그녀를 향해 묻자, 70대의 노정객이 인자한 할아버지가 손녀딸을 대하듯 잔잔한 미소를 띄우며 입을 열었다.
"어허! 이 사람아! 샥시가 놀라 도망치겠네! 좀 다정하게 말하게나."
"어이구! 선상님! 제가 늘 수백 수천명의 회사와 공장에서 일하는 부하들에게 연설하다보니까 저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습니다. 하하하!"
이윽고 40대 사나이가 그녀에게 물었다.
"아참! 아가씬 이름이 뭔가? 오늘 선상님을 잘 모셔야 하네!"
"가수 하이나예요. 잘 부탁드립니다."
"하이나? 요즘 아가씨들은 이름부터 서양애들 같다니까요! 선상님! 마음에 드십니까? 그저 회춘하시려면 이런 영계가 최곱니다. 하하하!"
40대 사나이는 안하무인한 태도로 그녀를 70대 노정객에게 진상을 했다.
"에끼! 이 사람아! 이런 술자리에선 샥시가 산삼인게야! 소중하게 대해야지!"
그러자 노회한 왕이 절색의 후궁을 가지고 놀듯 70대의 노정객이 은근한 추파를 던지며 하이나를 그의 눈동자 안에 담았다.
이때 하이나는 멋적고 면구스러워서 상감청자같은 술병을 들어 두 사람의 술잔에 따랐다.
"잠깐! 술은 황진이 같은 명기가 따라야 제맛이지! 샥시! 옆방에 가면 한복이 있을게야. 좀 갈아입고 오지 않겠나?"
"네에? 선상님! 이 집이 단골인 줄은 압니다만…"
"어이! 박상도 사장! 앞으로 국회에 진출해 국사를 논하려면 그만한 풍류를 알아야지. 내가 옛날에 각하를 모시고 다닐 때엔 정말로 변사또가 부럽지 않았다네! 가야금 풍악을 울리며 미스 코리아도 울고 갈 미녀들이 따르는 술잔에 아주 익사할 지경이었다니까? 역시 큰정치는 그리 해야 돼! 그러니까 그분께서 이 나라를 근대화시켰고, 오늘날 세계경제 10위권을 이루는 초석을 놓으신게지!"
하이나가 70대 노정객의 일장연설에 잠시 머뭇거리자, 40대 박상도 사장이 호통쳤다.
"뭐하고 있어? 어서 옷갈아 입고 선상님께 술을 따라올려야지!"
그 바람에 그녀는 옆방으로 건너가 가장 화려한 한복을 골라 입고 전통명주를 따르자 박사장이 호기있게 말했다.
"선상님! 이 가시나는 선상님꺼이오니, 맘대로 하십시오! 자고로 영웅호걸은 색을 밝힌다지 않았습니까?"
"좋아! 그럼 늙은이가 박사장 앞에서 주책 좀 부려 볼까?"
"예에! 술에 취하셨으니 주책은 당연하시죠. 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