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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농민항쟁 의의와 재조명
진주농민항쟁 의의와 재조명
  • 박태홍
  • 승인 2012.09.03 17:4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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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 태 홍 본사 회장
 진주시내에서 나동면을 지나 우측으로 쭉 가면 진수대교가 나온다.

 대교가 끝나는 지점에서 우회전해 진양호를 거슬러 승용차편으로 10여 분 가면 수곡면사무소가 나오고 딸기 생산으로 잘 알려진 수곡 들이 눈앞에 펼쳐진다. 수곡 들을 좌측으로 잘 닦여진 지방도를 따라가다 보면 진서중고등학교가 나오고 바로 앞 덕진강변에 진주농민항쟁 기념탑이 우뚝 서 있다.

 지난주 공영방송에서 역사스페셜로 방영되기도 한 진주농민항쟁의 재조명은 오늘을 살아가는 진주민들에게 큰 의미를 되새겼기도 하겠지만 그 기념탑이 진주시 수곡면 창출리에 있다는 그 사실 자체를 자랑거리로 삼아도 무방하리라. 조선후기 민중봉기의 발화점이 된 그곳에는 앞장서 농민항쟁을 이끌었던 류계춘, 김수찬, 이귀재 등과 함께 50여 명의 동지들의 이름이 새겨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진주농민항쟁은 조선후기인 1862년 사회 모순이 전면화 되면서 발생했다.

 지주와 소빈농, 작인 사이에서 발생되는 경제적 이해의 시각 차이에서도 원인이 있었겠지만 결정적 요인은 삼정의 문란 즉 군정, 전정, 환곡에 대한 농민들의 불만이 커지면서였다.

 군정이란 16~60세 사이의 남자들이 군포를 내야 했고, 전정이란 토지에 부과되는 세금이며, 환곡은 봄에 농민들의 곡식이 다 떨어졌을 때 나라에서 빌려줬다가 가을 추수 후에 받아들이는 제도를 말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당시의 나라살림은 백성들이 내는 세금으로 이뤄질 때인 만큼 농민들이 봉기로 나라세금 내기를 거부하고 민란을 일으켰으니 큰일일 수밖에 없었다. 진주수곡장터에서 발화한 민중항쟁은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삼정의 폐단이 도마 위에 오르는 등 환곡제도를 시정하거나 폐지해야 한다는 당시의 여론을 형성하는 계기를 만들기도 했다.

 철종 12년 조정에서는 민란을 수습하기 위해 안핵사, 선무사, 암행어사 등을 현장에 파견, 민란을 수습토록 하는 한편 주동자들을 극형에 처하고 관련 탐관오리 등에게도 벌을 내리기도 했다.

 조정의 폐단과 탐관오리들의 횡포 앞에 맨몸으로 맞선 주동자들과 이때 희생된 농민들을 기념하는 탑이 우뚝 세워졌다는 사실, 늦은 감이 있긴 하나 감회가 새롭기 그지없다. 진주농민항쟁 기념탑 옆에 새겨진 정동주 시인의 ‘농사는 하늘의 뜻 섬기는 일, 농부는 사람을 섬기는 하늘이외다. 하늘보고 침 뱉지 마라. 사람이 곧 하늘이니(人乃天)’ 시구(詩句)가 보는 이들로 하여금 그 당시를 회상하게도 하고 애잔하게 마음에 와 닿는다.

 농부들이 이마에 흰 수건을 동여 메고 장터에 모여 조정의 불만을 토로하던 그때나 지금이나 덕진강은 말없이 유유히 흐르고 있다. 그 당시 농민들의 절규를 잊어서는 안 된다. 되새겨야 한다. 그것이 근간이 돼 오늘날의 민주화를 앞당긴 초석이 됐으며 그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우리들은 역사를 배우고 바른 역사를 후세에 전하고 있는 것이다.

 한 가지 필자의 욕심이라면 진주농민항쟁 기념탑 옆에 작은 관리사 한동과 탑 주위를 살피고 안내하고 관리하는 안내원 한 사람 있었으면 그들의 영령이 외롭지는 않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필자도 바쁜 걸음에 술을 준비하지 못해 담배 한개비로 그들에 대한 예를 올렸것만 뭔가 아쉽고 숙연함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자라나는 후세에 본보기를 삼고자 이탑을 세운 진주시농업인단체협의회 외 15개 단체임원, 희생자 유족, 그리고 진주시에 감사드린다.

 앞으로의 과제는 진주 형평사운동과 진주 농민항쟁을 묶어 이 나라 민주화의 효시는 진주에 있었다고 알려야 한다. 그리고 민주화의 성지를 꾸준히 가꿔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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