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19 20:53 (금)
말갑옷(馬甲), 철의 왕국 아라가야 ‘정수’ 보여주다
말갑옷(馬甲), 철의 왕국 아라가야 ‘정수’ 보여주다
  • 음옥배
  • 승인 2012.07.30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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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함안 마갑총서 전국 최초 가장 큰 유물 1500년만에 출토
말이산 6호분ㆍ8호분서 추가 발굴… “고구려 고분벽화서 현실로”

   함안박물관 ‘아라가야의 혼’ 전시


 1992년 6월 6일 함안군 가야읍 해동아파트 신축공사 현장. 현충일에 오락가락 빗방울이 뿌리고 있어도 여전히 굴삭기 소리가 울렸다.

 신문배달을 하는 이병춘(38ㆍ당시 학생) 씨도 바쁜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그런데 굴삭기가 파낸 흙에 거무튀튀한 쇠가 눈에 띄었다. 어릴 때부터 함안이 아라가야의 땅이라는 것을 듣고 자란 이씨는 자기가 본 것을 역사학을 전공한 지국장에게 이야기했고 지국장은 이를 군청에 신고했다.

 공사가 중단되고 창원문화재연구소(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에서 나온 조사원은 흩어진 쇠를 수습했다. 그것은 말의 왼쪽을 감싸는 갑옷이었다. 조사원은 또 파헤쳐지지 않은 땅에서 말의 오른쪽을 감싸는 온전한 형태의 갑옷을 찾아냈다. 말의 얼굴의 감싸는 마면주(馬面胄)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출토된 마갑(馬甲, 말의 갑옷)은 그렇게 호국영령을 기리는 뜻 깊은 날에 극적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마치 아라가야의 영혼을 잊지 말라는 듯이… 이렇게 묻힌 지 1500년의 세월이 지난 후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면서 마갑은 위대한 나라, 아라의 부활을 예고했다.

 마갑은 중장기병(重裝騎兵)의 기본이다. 사람과 말이 모두 무장한 중장기병은 현대의 전차처럼 강력한 방호력을 갖추고 전장을 마음대로 누비며 막대한 파괴력을 자랑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4세기 후반 고구려에서 처음 등장한 것으로 보는데 광개토대왕은 이 중장기병을 바탕으로 광활한 영토를 마련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갑은 철기문명의 꽃이다. 상하좌우로 마음대로 활보하는 말의 움직임을 제한하지 않으면서도 말을 보호해야 하므로 쇠를 다루는 고도의 기술이 있어야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함안에서 출토된 마갑은 총 440~453개의 형태가 다른 조각을 연결해 총길이 2m26㎝~2m30㎝, 너비 43~48㎝로 만들었다. 보호하는 부위에 따라 조각의 크기가 다르며 마갑을 잇는 줄을 꿰는 구멍도 아주 미세하다.

 이 마갑이 더 의미가 깊은 것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완전한 형태가 출토됐다는 점이다. 평안남도 용강군의 쌍영총, 남포의 약수리고분 등 고구려의 고분벽화에는 말과 사람이 함께 무장한 개마무사(鎧馬武士)가 등장하는데 경주와 동래, 합천에서 마갑의 일부 미늘 조각이 출토된 것을 제외하고는 단지 벽화 속에서 존재할 따름이었다.

 그런데 함안에서 발견된 마갑은 머리, 목, 가슴, 몸통 부분을 확실히 구별할 수 있는 완전한 형태가 출토돼 아라가야의 위상을 확실히 보여주는 유물로 평가받는다.

 그 뒤 함안 말이산 6호분과 8호분에서 두 벌이 더 출토되고 2007년에는 경주 쪽샘지구에서도 함안 것보다 크기가 작은 마갑이 발굴돼 국내 유일의 마갑으로서의 지위는 상실했지만 아직도 국내

최초로 완전하게 발굴된 가장 큰 마갑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현재 마갑이 나온 고분은 마갑총(馬甲塚)으로 명명되는데 이 마갑총은 대형 나무곽무덤(목곽묘)으로 나무곽의 길이는 6m, 너비 2m30㎝, 깊이 1m 규모였다. 나무곽 가운데 시신을 눕히고 오른쪽 가슴부위에 둥근고리칼이 놓여 있었으며 그 양 곁으로 마갑이 펼쳐진 채 있었는데 철제 재갈, 철낫 등 금속유물과 함께 목긴 항아리 등 여러 가지 토기들도 함께 출토됐다.

 말이산 6호분은 봉분 길이가 33m이며 석곽의 상부 길이는 14m, 너비 4.7m에 이르는 대형수혈식석곽묘이다. 도굴로 인해 훼손에다 철기류는 오랜 세월로 부식이 심한 상태였는데 철정 65덩어리, 대도 한 자루와 함께 주피장자의 발치 아래에서 마면주 다섯 조각, 마갑 109 조각 등이 수습됐으며 다양한 토기류도 출토됐다.

 말이산 8호분 역시 봉분의 길이 32m에다 석곽의 길이 11m, 너비 1.85m의 대형수혈식석곽묘이다. 많은 토기유물과 함께 길이 70㎝와 74㎝의 환두대도 두 자루와 대도 두 자루가 나왔으며 역시 수십 점의 철정과 함께 주피장자의 발치 아래에서 마갑과 마면주가 함께 수습됐다.

 한편 마갑총에서는 아라가야의 위력을 보여주는 또 다른 유물이 함께 출토됐다. 바로 둥근고리칼(환두대도)이다. 길이 83㎝의 둥근고리칼은 자루에 용의 문양이 새겨져 있고 금으로 장식돼 있어 무덤주인이 최고 권력층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 개마총의 벽화에 나오는 고리자루칼과 형태가 유사해 고구려와의 연관성을 보여주고 있다.

 이 때문에 마갑총의 마갑이 아라가야에서 제작한 것이 아니라 삼국사기에 기록된 AD 400년에 이뤄진 고구려의 남정 때 획득했을 것이라는 주장이 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특히 말이산고분군 6호분과 8호분과는 달리 마갑총에는 말의 가슴을 감싸는 사다리형 조각이 나타나지 않고 또 마갑총에는 있는 말의 머리를 감싸는 상원하방형과 종장판형 조각이 6호분과 8호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이는 방위 부위가 달라서 그런 것으로 고구려의 남정 때 획득됐다는 가설을 더 뒷받침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그러나 아라가야는 한반도 남부와 왜를 지배한 강대국이었으니 한반도에서는 십악검을, 왜에서는 초치검을 만든 기록이 일본서기에 나오는 등 뛰어난 제철기술을 갖고 있었고 고구려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여러 가지 형태를 충분히 만들 수 있었다고 본다.

 가야의 무덤은 목곽묘에서 석곽묘로, 낮은데서 높은 곳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그래서 목곽묘인 마갑총은 석곽묘인 말이산고분군이 생기기 이전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며 4세기 말엽에서 5세기 초엽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런데 이 시기는 아라가야의 전성기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잃어버린 한국고대사연구회 홍순주 회장이나 백제에 의한 왜국통치 삼백년사에 의하면 400년은 일본서기에 기록된 아라사등의 둘째아들인 천일창(天日槍)이 중국사서에 나오는 왜왕 찬으로 등극해 아라가야가 실질적으로 왜를 지배하던 시기였다.

 특히 천일창은 일본서기의 응신천황으로서 왜의 담로도에 머물던 아화왕자와 협력해 390년 한반도의 아라가야를 회복하고 백제까지 쳐들어가 392년 진사왕을 물리치니 백제에서는 아화왕이 등극하고 왜에서는 479년까지 계속되는 대화조정이 열린 것이다.

 광개토대왕의 비문에 기록된 신묘년의 왜는 바로 이 천일창과 아화의 군대이며 특히 아라가야의 군대는 고구려와도 긴밀히 협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 근거가 396년의 광개토대왕 비문에만 나오는 남정이나 400년의 남정 이후 삼국사기의 기록인데 396년 남정이후 백제가 397년에 왜에 인질을 보냈고 400년 남정이후에는 신라가 402년, 백제가 403년에 왜에 인질을 보낸 기록이 있다.

 당시 왜는 천일창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특히 남정이 끝난 이후 고구려에 인질을 보낸 것이 아니라 왜에 인질을 보낸 것은 아라가야와 고구려의 협력관계가 아니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이다. 이를 되짚어보면 아라가야가 신라와 벡제를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에 남정을 요청했을 개연성도 있다.

 이와 같이 고구려와 밀접한 관계 속에 광대한 영토를 이루며 왜에 철기를 전한 아라가야였기에 여러 형태의 마갑도 충분히 만들 수 있었다는 추정이 타당성을 갖는 것이다. 그리고 함안에서 출토된 세 벌의 마갑이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1500년의 세월이 지나 세상에 나온 마갑…. 함안군은 이 마갑을 ‘아라가야의 혼’으로 이름 짓고 관광객들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다.

 함안박물관 손영호 학예사는 “말갑옷과 마갑총 출토 환두대도야말로 아라가야 시대가 대단한 철기문화를 꽃피웠음을 말해주는 것”이라며 “아라가야의 혼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다”고 말했다.

 문의 : 함안박물관 (055) 580-3902~4

편집 = 구정희 기자 / 취재 = 음옥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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