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19:45 (토)
웬 TV채널이 이렇게 많아?
웬 TV채널이 이렇게 많아?
  • 조증윤
  • 승인 2012.06.13 20: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조 증 윤극단 번작이 연출가
 TV를 켠다. 케이블에 연결된 내 집 TV 채널수는 어지러울 정도로 많다. 뉴스전문채널에다 재방송채널, 스포츠 채널, 다큐채널, 오락채널, 영화채널 등 무엇을 봐야하는지 선택하기조차 어려운 채널들이 잘 차려진 진수성찬마냥 수두룩하다. 볼거리가 많다는 것은 행복한 고민이다.

 하지만 선택권은 넓어졌으나 무엇부터 젓가락질을 해야 할지 모르는 진수성찬의 맛난 음식처럼 오히려 너무 많아서 선택이 좁아진 느낌이다.

 거기다가 말 많던 종편(綜編), 즉 종합편성채널이 작년 12월 1일부터 개국됨에 따라 지상파 3사와 똑같은 역할을 하는 새로운 TV채널이 4개나 늘어났다. 시청자의 입장에서 보면 더욱 더 다양한 콘텐츠를 즐길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니 기쁠 수도 있겠지만, 시청률에 의지한 방송사간의 지나친 경쟁으로 더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프로그램이 많이 만들어 질 수도 있다는 염려도 든다. 더군다나 대형 신문사들이 방송에 참여하다보니 시사나 뉴스전달에 있어 자사의 논조가 그대로 전달이 될 가능성의 우려도 있다는 것이다.

 수많은 미디어들 사이에서 재방송조차 어려운 직접예술의 형태인 연극에 대한 선택의 폭은 한없이 좁아진 느낌이지만 그래도 바보상자라 일컬어지는 TV앞에서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낭비하기 싫은 모양이다. 너무 많아 볼 것을 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종종 발품을 팔며 공연장을 찾아주니 그나마 위안이며 기쁨이다.

 `가난한 연극`이란 장르가 있다. `연극하면 배고프다`라는 형편에 대한 가난함의 의미가 아닌 연극 본질의 가난함에 대한 의미다. 폴란드의 연출가 `예지 그로토프스키`가 영화와 텔레비전이 할 수 없고 연극만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에 대한 실험정신으로 탄생한 연극 장르가 바로 `가난한 연극`이다.

 이는 연극이 그 기계적 능력을 아무리 확장시켜도 테크놀로지 면에서 화려한 영화나 TV를 절대 따라갈 수가 없으니 연극의 비본질적인 요소들인 장치, 분장, 조명, 미술, 음향효과 등을 제거하고 연극의 본질적인 요소인 배우와 관객들에 집중하자는 연극이다. 쉽게 설명하면 무대장치나 무대의상, 조명, 분장 등의 화려함을 빼고 오직 배우의 신체를 이용해 관객들과 함께 하는 연극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면 된다.

 요즘 공연되는 뮤지컬이나 연극은 그 화려함이 TV나 영화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볼거리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화려함을 떠나 텅 빈 무대에서 오직 배우들의 열연과 톡톡 튀는 소재의 이야기나 아이디어로 승부를 거는 가난한 연극들도 자주 만날 수 있다.

 그래봤자 개개인의 가정 거실에 놓인 그 많은 텔레비전을 상대로 하거나 더욱이 300개나 넘는 개봉관을 독차지한 블록버스터급 영화가 블랙홀처럼 사람들을 끌어 모으는 현상 앞에서 오직 전국개봉관 한 곳에 불가한 연극은 아무리 생각해도 불리한 것은 사실이다.

 무대공연이 더 화려해지고 소재와 아이디어가 더 뛰어나다고 해도 결국 매스미디어의 무차별 배포 앞에서 고군분투할 수밖에 없는 쓸쓸함을 연극은 안고 있다.

 늦은 오후에 시작해서 늦은 밤에 끝나는 연극연습시간 덕분에 TV를 접할 수 없는 나는 수많은 케이블 채널에 대한 선택의 갈등이 없어서 다행이다. 그래도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연극을 하다보면 화려한 무대에 서고 싶은 욕망은 감출 수가 없나보다. 그 화려한 무대를 위한 최선은 오늘 서 있는 가난한 무대 위에서 최선을 다해 후회 없이 살아주는 일이다.

 가난한 연극을 하는 우리를 위해 친구가 놓고 간 자양강장제가 한 가득이다. 문득 밤 늦은 시간에 지치지 않는 열정은 강장제의 힘일까? 아니면 친구가 보내준 마음의 힘일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