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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나무와 강대나무
꿈나무와 강대나무
  • 김루어
  • 승인 2012.05.23 19:41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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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인 김 루 어 소설가 겸 시인

가인 김 루 어
소설가 겸 시인

 오월은 꽃과 나무가 좋은 때다. 그 오월도 벌써 반 너머 지났다. 거리 곳곳에서 우리 눈을 황홀하게 하던 목련과 벚꽃은 이미 졌고 매화나무는 벌써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쉰이 넘고부터 계절에 대해 보다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고 나이에 대해 생각하는 일이 많아졌다. `피는 잎 지는 꽃에게 내게 남은 봄이 몇 번일까`를 묻는 일마저 있게 됐다. 젊을 때는 계절에 이렇게 민감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 때는 아마 내가 젊었기 때문일 터였다. 반세기 이상을 살았다는 것은 유전변이(流傳變移)는 자연의 섭리라는 것쯤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게 하는 세월이다. 하지만 인간이라는 동물은 언제나 이기적인 존재인지,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고 그 자리에 있는 것에 나이 먹어 갈수록 더 집착하게 된다.
 내게 있어서 가장 변하지 않는 것은 산이다. 변화를 그 안에 담고 있으면서도 변하지 않고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산. 그래서 나는 산을 좋아하고, 가능하면 일주일에 한 번,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한 달에 한 번이라도 산에 오르려 한다. 지난 일요일에 신어산(神魚山)에 올랐다. 휴일이어서인지 등산로에는 평일보다 많은 산행객들로 붐볐다. 나는 등산을 서두르지 않는다. 정상에 오르는 것을 목표로 삼지도 않는다. 체력이 약한 탓도 있지만, 천천히 오르면서, 길섶의 풀과 풀 섶에 핀 꽃과 녹음을 더해가는 나무를 보는 것이 더 즐겁기 때문이다.
 오월 신어산에는 천남성, 자운영, 민들레, 다래순, 한삼덩굴, 미역취, 싸리꽃, 패랭이꽃, 청미래덩굴, 큰개별꽃, 찔레꽃, 벌깨덩굴, 노루발풀, 하늘말나리꽃 같은 풀이나 꽃들이 제철을 맞아 보란 듯이, 혹은 수줍게, 혹은 은근하게 제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작약은 꽃봉우리만 이루었을 뿐 아직 꽃을 피우지는 못했고, 금붓꽃은 켜켜이 묵은 낙엽위로 노란 꽃순만 내밀고 있었다. 그렇지만 기대했던 얼레지와 진달래는 이미 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장관은 사람들의 눈을 활활 불태우는 군락을 이룬 철쭉이었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풀과 꽃들의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나무를 더 좋아한다. 내가 풀이나 꽃 같은 초본식물보다는 나무를 더 좋아하는 까닭은 한철인 풀이나 꽃보다 계절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면서도 스스로를 새롭게 하면서 끊임없이 자라는 나무가 더 인간을 닮았기 때문이다. 물론 생을 누리는 세월의 장단에 차이가 있지만, 풀이나 꽃 같은 초본식물도 순환하는 자연의 이치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는 측면에서는 이들의 삶 또한 인간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기는 하다. 이들의 삶은 순응하는 삶이다. 계절이라는 환경이 자신에게 맞을 때에만 자라고 꽃피우고 열매 맺는. 하지만 나무는 다르다. 계절이라는 환경이 자신에게 맞지 않더라도 일단 한 번 뿌리를 박으면 견딘다. 이 지점에서 나무가 보다 삶에 고집스럽고 보다 더 인간과 비슷하다.
 그래서 나는 나무를 좋아한다. 나무 가운데서도 관목(灌木)보다는 교목(喬木)을, 교목 가운데서도 낙엽수보다는 상록수를, 상록수 가운데서도 흔하디흔한 소나무를, 흔하디흔해서 문을 나서면 바로 만날 수 있는 이웃 같은, 늘 푸른 소나무를 나는 좋아한다. 신어산 소나무는 지금이 한창 솔 순향이 좋을 때다. 오월 솔 순향에 이끌린 탓일까. 허리에 고질이 있는 나로서는 신어산행 가운데는 드물게 정상까지 올라갔다. 신어정에서 잠시 땀을 씻고 선착한 산행객들 속에 끼여 저 멀리 북동쪽으로 비단 띠를 풀어놓은 것처럼 유장하게 흘러가는 낙동강을 내려다봤다. 저 강물처럼 흘러가고 싶어도 현실이라는 땅에 뿌리박혀 꼼짝달싹 못하는 나무 같은 내 삶이 부러운 눈길로.
 내려오는 길에 은하사에 들렀다. 주말이라 절집도 사람들로 붐볐다. 차례를 기다려 대웅전에서 관음보살님에게 삼배하고 나오는데 일주문 돌계단에 앉은 젊은이들이 나누는 대화가 귀에 잡혔다. 국회의원자리가 그렇게 좋은가? 서른 조금 넘어 국회의원이면 엄청난 출세잖아. 쉽게 내놓고 싶겠어? 그 젊은이들 간에 오가는 대화는 통합진보당 부정경선 사태였다. 신어정에서도 이런 대화를 들었던 것 같다. 요즘 어디를 가나 세간의 화제는 단연 통진당 사태다. 나는 언제부터인가 정치권 뉴스를 흘려듣게 됐다. 정치권에 어떤 기대를 가졌다가 실망하거나 환멸을 느낀 적이 한 두 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유를 말하고 민주를 말하고 정의를 말하고 복지를 말하지만, 세월이 지나고 보면 그들은 최소한 나무처럼 곧지도 않고 풀처럼 푸르지도 않는 민낯을 드러내고 만다. 이를테면 내게는 정치나 정치인이란 존재는 필요악,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이번 사태는 워낙 막장드라마 같아서 나도 여론 일반처럼 제법 충격을 받았다. 민주주의의 일반원칙을 위반했다는 점에서, 또 자기 정파의 이익을 위해 중인환시 속에 폭력을 동원했다는 점에서, 더해 자신들의 잘못을 결코 인정치 않는다는 점에서.
 그러나 무엇보다 내 충격을 심화시킨 것은 폭력을 자행한 자들 가운데 대학생과 고교생으로 보이는 이십대 초반과 십대후반 젊은이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나는 이들이 자기 신념에 따라, 혹은 사주를 받아 폭력을 행사한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 하지만 전자인 경우라 하더라도, 누구든 정치적인 소신을 가질 수 있고 그 소신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이유로, 폭력이라는 방법으로 정치적인 뜻 관철을 시도한다면 결코 용납될 수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후자인 경우는 더 문제다. 대학생과 고교생은 나무에 비교하면 소위 말하는 꿈나무다. 자신을 갈고 닦아야 할 꿈나무가 이미 산화되어 고철덩어리가 되어버린 이념이나 기성 정치꾼의 도구가 되어 제대로 자라지도 못한 채 강대나무로 꺾여 기성정치꾼들의 방안을 데워주는 화목이 되어서야 되겠는가? 기성 정치꾼도 이 지점에서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대들 서 있는 자리가 비록 너덜겅이라 하더라도 꿈나무를 강대나무로 꺾이게 하여 너덜겅 거름으로 만들 권리는 그대들 누구에게도 없다. 하물며 꿈나무들은 우리들 미래, 인간이 사는 세상이라는 숲을 푸르게 일궈줄 우리들 미래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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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동기 2013-02-13 23:26:29
아침을 여는 시선을 접하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합니다.
우연히 찾아와 루어선생님의 작품을 보면서 다시금 미래지향적인 세상을 염원해 봅니다.
가끔씩 들려서 다 읽지 못한 루어선생님의 작품을 정독하고 싶습니다.
기회가 된다면 작품을 펌하여 문학카페에도 올리고 싶은데
저작권 침해가 되지 않을련지요?
루어 선생님~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