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4-20 15:55 (토)
‘고교등급제’와 정의란 무엇인가
‘고교등급제’와 정의란 무엇인가
  • 류한열 기자
  • 승인 2010.09.16 20: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류한열의 e시각
▲ 류한열 편집부장

우리 사회에 현재 ‘공정’과 ‘정의’라는 말이 가장 많이 회자(膾炙)되고 있다. 공정은 공정한 사회를 국정 기조로 내세운 정부 덕에, 정의는 마이클 샌델 교수의 책 ‘정의란 무엇인가’가 인기를 끌면서 다분히 추상적 개념 두 개가 친숙하게 자리를 잡고 있다. 정부가 공정한 사회를 지향하면서 우리 주위에 공정을 거스르던 것들이 예전보다는 밝히 하나둘 드러나고 있다. 고위 공직자 자녀들이 맘 놓고 누렸던 특채가 불거지면서 서민들이 마음의 상처를 입었지만,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이 물러나는 걸 보면서 ‘공정의 탑’에 돌 하나를 얹었다고 자위했다.    

 우리 사회를 휘감고 있는 불공정의 사슬은 하루아침에 끊을 수 없다. 누구나 힘을 갖게 되면 기득권을 형성하고 거기서 안주하기를 원한다. 특권층에 속해 누리는 구별된 의식은 꽤나 달콤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불공정한 행태를 들쑤셔 흔들어 그것들이 가라앉으면서 바른 질서로 정착해야 한다. 그래야 누구나 공정한 기회를 갖는 공정한 사회가 되는 것이다. 앞으로 더욱 우리 사회를 지탱할 공정과 정의에 대한 폭넓은 논의가 있어야 한다.  

 15일 창원지법 제6민사부는 2009학년도 고려대 수시2-2 일반전형에 응시했다가 떨어진 수험생 24명의 학부모가 학교법인 고려중앙학원을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를 판결했다. 고려대학교가 신입생을 모집하면서 ‘고교 등급제’를 적용해 학교별 성적차를 일부 적용한 것이다. 수능에서 나은 점수를 얻고도 출신 고등학교 때문에 떨어진 경우가 있었다는 얘기다. 고등학교의 학력차를 인정하는 게 바른가, 고교 등급제는 현대판 연좌제 인가 등등 공정의 바탕 위에 입시 정의를 물어볼 때다.

 재판부 판결문을 보면 고려대가 의도적으로 특수목적고 출신 학생들을 선택하기 위해 부당한 재량권을 남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고려대가 정의롭지 못한 행위를 했다고 볼 수 있지만, 고려대 입장에서 변별력 없는 내신으로 인해 우수한 학생을 뽑기가 어렵기 때문에 엄연히 존재하는 고교 간 학력 격차를 인정하는 걸 당연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교육부는 고교들 간에 학력차가 없어야 한다는 것을 이유로 고교등급제를 금지해왔다. 교육기회의 형평성과 교육의 공공성 등 원칙적인 면에서 위배된다는 것이다. 고교등급제가 허용되면 진학 경쟁이 과열되고, 우수학교에 가기 위한 위장 전입 등 사회적인 혼란이 야기될 것이라는 분석이다.

 고려대학교가 변별력 없는 내신으로 인해 우수한 학생을 뽑기가 어렵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학생들의 공정한 기회를 빼앗아 버렸다. 일반계 고교 출신 학생에 비해 특수목적고 출신 학생을 우대했다는 것은 공정한 사회를 내세우기 전에 행한 일이지만 지금 시점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사안이다. 상대적으로 대학 입시에 희생을 당한 일반고 성적우수 탈락자들의 줄 소송이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수시모집과 입학사정관제를 둘러싼 공정성 논란이 확산되고 있는 가운데 이번 판결로 이른바 ‘명문대학’들의 폐쇄적인 입시 관행을 깨뜨릴 수 있을지 여부에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그러면서 엄연히 존재하는 고교 간의 학력차를 인정하는 게 더 정의롭다는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정의란 무엇인가’라고 회의를 품는 모든 목소리를 담아 새로운 공평의 잣대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