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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마진 통합추진과 ‘旁岐曲逕’
창마진 통합추진과 ‘旁岐曲逕’
  • 박유제 기자
  • 승인 2009.12.24 2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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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제
편집부국장
 우리나라 지식인사회는 지난 1년의 사회 전반을 어떻게 평가할까? 예상대로 부정적이었다.

 대학교수를 포함한 지식인들이 지난 20일 ‘교수신문’을 통해 발표한 ‘올해의 사자성어’로 ‘방기곡경(旁岐曲逕)’을 선정했다고 한다.

 ‘방기곡경’이란 샛길과 굽은 길을 뜻하는 말로, 조선 중기의 대표적 학자인 율곡 이이(李珥) 선생의 ‘동호문답’에서 비롯됐다.

 이이 선생은 여기서 군자와 소인을 가려내는 방법을 설명하며 “소인배는 제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 ‘방기곡경’의 행태를 자행한다”고 말했다.

 이후 ‘방기곡경’은 일을 정당하고 순탄하게 하지 않고 그릇된 수단을 써서 억지로 추진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로 사용돼 왔다.

 지식인사회가 저물어 가는 2009년 한해를 ‘방기곡경’으로 비유한 것은 예사롭지 않다. 이명박 정부에 대한 지식인 사회의 반대정서를 그대로 방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방기곡경(旁岐曲逕)’이 교수신문 필진과 주요 학회장, 전국대학교수협의회 회장, 일간지 칼럼니스트 등 지식인 21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였으니 그 예봉도 날카롭다. 칼끝은 4대강 사업과 세종시 수정 강행을 겨눴다.

 MB정부를 힐난하는 ‘방기곡경’을 올해의 사자성어로 추천한 안대회 교수(성균관대)는 “정치권과 정부가 여러 정치적 갈등을 안고 있는 문제를 국민의 동의와 같은 정당한 방법을 거치지 않고 독단으로 처리해온 행태를 적절하게 비유했다”고 설명했다.

 안 교수는 대표적인 정치적 갈등의 원인으로 세종시법 수정, 4대강 사업 강행, 미디어법 처리 등을 들었다.

 그는 또 “올해 우리 사회가 겪은 사회적 혼란은 정부와 집권 정당의 이런 자세 때문에 심화됐다”고 강조하고 “한국의 정치가 올바르고 큰길로 복귀하기를 바라는 소망까지 반영한 사자성어”라고 덧붙였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와 연결시키는 학자도 있었다. 강남훈 교수(한신대학교)는 “전직 대통령을 죽음으로 몰아간 표적수사 등은 방기곡경의 행태를 보여준 것”이라고 주장했다.

 노 전 대통령이 서거하기 전인 지난해 말에도 ‘교수신문’은 ‘병을 숨기면서 의사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의미의 ‘호질기의(護疾忌醫)’를 ‘올해의 사자성어’로 선정, 문제가 있는데도 다른 사람의 충고를 듣지 않는다는 MB정부를 힐난한 바 있다.

 그렇다면 ‘올해의 사자성어’가 정치권력에 대한 비판만 해 왔을까? ‘교수신문’이 제17대 대통령선거일을 나흘 앞둔 2007년 12월 15일부터 선거일 하루 뒤인 20일까지 교수 340명을 대상으로 ‘희망의 사자성어’를 조사한 결과 32%의 응답자가 ‘광풍제월(光風霽月)’을 택했다.

 ‘광풍제월’은 북송의 시인인 황정견이 유학자 주돈의 훌륭한 성품과 잘 다스려진 세상을 표현하면서 비롯된 말이다. 현재는 갖가지 난제와 의문이 씻은 듯이 풀리고 밝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한해가 되길 바라는 마음의 표현으로 자주 사용되고 있다.

 결과적으로 17대 대통령선거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 지식인사회가 가졌던 사회 전반에 대한 희망(광풍제월)이 MB정부 출범 후에는 낙심(호질기의)과 힐난(방기곡경)으로 바뀌었다는 얘기가 된다.

 경남의 최대 현안으로 급부상한 창원 마산 진해시의 통합추진 과정을 보면 ‘방기곡경(旁岐曲逕)’이란 고사성어가 딱 맞아 떨어진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창마진 통합은 행정안전부가 지난달 10일 해당 지자체의 지방의회가 모두 찬성하면 주민 의사와는 무관하게 통합이 이뤄지도록 하는 내용의 일방적 통합안을 발표하면서 불이 붙었다.

 소속의원의 대다수가 집권당 소속인 마산과 진해, 창원시의회가 차례로 통합에 찬성하면서 일사불란한 모습이다.

 경남도의회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여당 소속의 이태일 의장이 24일 창마진 통합 의견안을 직권으로 상정, 야당 소속 도의원들의 강력한 반발로 정회되는 소동을 빚었다.

 지난 22일 도의회 기획행정위원회가 이 안건을 폐기하고 본회의에 상정하지 않기로 결정한데 대한 일종의 권한 행사다.

 앞서 내년 지방선거에서 통합시장 출마설이 끊이지 않는 이달곤 행정안전부 장관이 23일 기자들에게 “(창마진)통합 여부는 국회에서 법으로 정하는 사항”이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처럼 의사결정 과정에서 지역주민들이 철저히 소외되면서 지방자치의 본질이 훼손되고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지만, 행정통합을 강행하려는 정부와 지방의회에는 ‘죽은 소귀에 경 읽기’다.

 4대강 사업, 세종시법 수정에 이어 행정통합까지 주요정책에 대한 정부여당의 일방통행식 강행처리는 그래서 ‘방기곡경(旁岐曲逕)’이다.

 그리고 여론수렴 과정을 거치지 않는 이들 사업의 추진에 따른 후폭풍은 고스란히 국민과 지역주민이 떠안아야 될 판이다.

 MB정부가 출범하고 난 직후부터 청와대와 집권당 주요 인사들이 입버릇처럼 강조하든 그 흔한 ‘소통’은 도대체 언제쯤 이뤄질까?

박유제 편집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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