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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배출했던 경남의 ‘春風落葉 ’
대통령 배출했던 경남의 ‘春風落葉 ’
  • 정종민 기자
  • 승인 2009.03.2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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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민
사회부장
 봄날에는 만물을 움트게 하고 꽃을 피우는 화창한 기운이 돋고(춘풍화기ㆍ春風和氣), 가을바람에 낙엽이 떨어지는(추풍낙엽ㆍ秋風落葉) 것이 계절의 이치다.

 그러나 격랑 치는 정치와 사정의 칼날 속에서는 이 계절의 이치마저도 삼켜버리는 모양이다. 예전에 잘 나가던 인물들이 봄바람이 부는데도 낙엽처럼 떨어지고 있어 춘풍낙엽(春風落葉)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대검찰청 이인규 중앙수사부장(검사장)은 지난 20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T.S 엘리엇의 장편 시 ‘황무지’를 인용해 “4월은 잔인한 달이다. 차라리 겨울이 따뜻했다”는 말로 사정당국의 계절감각을 대변하기도 했다.

잔인한 4월의 서막

 잔인한 달을 예고하는 서막은 지난해 12월 1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친형인 노건평씨가 검찰 소환, 조사를 받은 다음 3일후인 4일 구속영장이 발부되면서 부터 시작됐다.

 이후 건평씨가 실소유로 있는 정원토건의 압수수색과 박연차 회장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정승영 정산CC(태광실업 계열사) 대표 소환조사를 거쳐 12월 10일 박 회장이 소환됐다.

 결국 전두환ㆍ노태우를 중심으로 한 군사반란이 발생(1979년 12월 12일)한지 정확하게 29년만인 12월 12일 춘풍낙엽의 진원지인 태광실업 박연차 회장이 구속됐다.

 박 회장이 구속되기 3일전까지만 해도 검찰은 “박연차 회장이 휴켐스 인수를 앞두고 정대근 회장에게 건넨 20억 원은 세종증권 주식 매각 시세차익 일부”라고 밝히면서 “박연차 리스트는 없다”고 리스트의 존재사실을 강하게 부인했었다.

노 측근 경남출신 6명 표적

 하지만 해가 바뀌고 춘풍이 불기 시작한 3월이 되면서 박연차 정관계 로비의혹에 대한 검찰의 행보는 빨라지기 시작했고, 대검찰청 중앙수사부는 17일 새벽 이정욱 전 한국해양수산개발원장을 불법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경기도 분당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체포했다. 1992년부터 2005년까지 한국해양수산개발원장을 지낸 이 전 원장은 2005년 4월 재보궐 선거 때 열린우리당 후보로 김해 갑에 출마, 낙선했었다.

 또 다음날인 18일 새벽에는 ‘김해 큰바위’로 불렸던 송은복 전 김해시장의 부산 자택을 급습, 긴급 체포ㆍ구속하기에 이르렀다.

 이어 현 정권의 실세였던 추부길 전 청와대 비서관도 체포되고 민주당 이광재 의원이 소환조사를 받았다.

 23일에는 박정규 전 청와대 민정수석과 장인태 전 행자부 2차관도 체포했다.

 장 전 차관은 남해가 고향으로 진주고를 나와 경남도행정부지사를 지냈다.

 박 전 수석은 김해출신으로 1980년 사시에 합격한 후 광주지검 검사를 시작으로 청주지검 영동지청장과 대검 공보담당관, 법무부 조사과장 등 검찰생활을 마친뒤 2004년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고시공부를 했던 인연으로 민정수석에 발탁됐었다.

 3월 들어 불과 1주일만에 이정욱ㆍ송은복ㆍ박정규ㆍ장인태 등 경남출신 인사 4명이 체포돼 구속 또는 구속영장실질심사를 기다리고 있다. 지난해 12월 이후 노건평씨와 박연차 회장을 포함해 노무현 전 대통령과 지근거리에 있었던 경남출신 인사 6명이 사정의 칼날을 맞은 셈이다.

“대통령을 배출한 죄(?)”

 공교롭게도 대상이 대부분 경남인사들이어서 경남지역을 온통 들쑤셔 놓은 꼴이 됐다.

 박 회장의 주된 활동지가 경남ㆍ부산이었던 만큼, 이 지역 정치인은 물론 관계에 이르기까지 여야를 가리지 않고 대부분 관련됐다는 설이 돌고 있는 터라 분위기가 흉흉한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이인규 중앙수사부장이 말한 “잔인한 4월”, 홍만표 대검찰청 수사기획관의 “마지막을 모르는 상황” 발언 등을 감안하면 여야를 불문코 정ㆍ관계 인사들을 잠 못 이루게 하는 대목이다.

 그 파장이 어디까지 미칠지는 알 수 없지만 박 회장 구속 때부터 예상됐던 “올 것이 왔다”는 말과 함께 더 많은 경남 인사들의 소환 및 사법처리는 자명한 현실로 까지 받아들여지는 분위기다.

 일각에서는 “분명 뇌물을 받고,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인사들에 대한 처벌은 당연하다”면서도 “대통령을 배출한 죄(?) 때문에 경남지역 인사들이 모두 죄인이 된 것 같다”는 자조 섞인 말도 나오고 있다.

 우리 속담에 ‘춘풍으로 남을 대하고, 추풍으로 나를 대하라’는 말이 있다. 따뜻한 바람을 남에게 불어줘 소생케 하고 기운을 북돋우며, 차가운 바람을 자신에게 쏘여 스스로 더욱 냉철하게 하라는 뜻이다.

 하지만 지금 경남지역에서는 춘풍이 사정의 추풍으로 바뀌어 과거의 역사를 정리하고 있다.

정종민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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