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침체의 골이 당초 예상보다 훨씬 더 깊을 것이라는 우려에서다. 미국은 지난달 소비자물가가 전달보다 1%나 내리며 1947년 통계 작성 이후 최대의 하락 폭을 기록했다.
지난 8월 이후 3개월 연속 하락세다. 에너지와 식품 가격 폭락 때문이지만 업종과 품목을 가리지 않고 가격 하락세가 확산되고 있어 내년에는 마이너스 물가까지 예상되고 있다.
이젠 단순한 경기 침체가 아니라 지속적인 물가 하락이 수반되는 디플레이션의 위협이 심각한 상황이다. 일본이나 유럽연합(EU)도 디플레이션까지는 아니라도 물가 상승률이 크게 떨어지는 추세다.
디플레이션은 흔히들 걱정하는 인플레이션보다 훨씬 무섭다. 투자와 소비 위축으로 경제 자체가 쪼그라드는 게 디플레이션이다. 일본의 ‘잃어 버린 10년’은 디플레이션의 파괴력을 웅변으로 입증한다.
우리는 다행인지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아직도 4%대 후반에 머물고 있어 디플레이션 우려는 상대적으로 덜한 편이다.
얼마 전만 해도 석유와 곡물 등 국제 원자재값 폭등에 따른 물가고에 시달리다 한숨 돌리게 된 건 좋지만 디플레이션의 먹구름이 세계 경제를 뒤덮는다는 것은 대외의존도가 70%를 넘는 처지에 결코 달갑지 않은 일이다.
가뜩이나 죽 쓰고 있는 내수가 금융 위기의 여파로 더욱 위축되는 터에 세계 경제 침체가 심화된다면 수출마저 부진을 면치 못하는 이중고를 피하기 어렵다.
그런데도 뾰족한 대응 수단이 별로 없다는 게 문제다. IMF 때에는 내수만 붕괴됐고 수출은 고(高)환율에 힘입어 단기간의 경기 회복에 효자 노릇을 했으나 이번엔 침체의 골이 훨씬 더 깊고 회복에 걸리는 시간도 훨씬 더 길 것으로 우려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타격을 다소나마 줄이려면 감세와 재정 지출 확대를 비롯한 부양책을 서두르는 수밖에 없다.
가계와 기업의 여력이 고갈된 만큼 비교적 여유 있는 재정이 나서서 소비와 투자를 부추겨야 한다.
사회간접자본(SOC) 시설을 비롯한 대규모 사업 집행과 인턴제 및 교육 훈련 확대 등을 통한 민관의 고용 증대에 재정의 역할이 요긴하다.
불황의 직격탄을 맞고 있는 저소득층 지원도 시급하다. 당정이 내년 3월까지 2조2,000여억 원을 투입한다지만 푸드스탬프제 도입 등 더 포괄적인 대책이 필요하다.
투자 위축을 막기 위한 원활한 자금 공급과 덩어리 규제 완화 등 ‘기업 하기 좋은 여건’을 조성하려는 노력도 게을리 해선 안 된다.
하지만 정치권은 경제 위기가 우리의 숨통을 시시각각 조이고 들어오는데도 영 딴 세상이다. 탁월한 영도력으로 난국을 돌파하는 귀감을 보이기는커녕 허구한 날 싸움질로 국민의 불안감을 증폭시킬 뿐이다.
우선 거대 여당이면서도 헌법재판소가 사실상 사망선고를 내린 종합부동산세 하나 처리하지 못하고 허둥대는 한나라당부터 상황 인식이 덜 돼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민주당도 어째서 정권 재창출에 실패했는가에 대한 심각한 자기 반성은 없이 사사건건 발목잡기로 일관하고 있으니 나라 일이 제대로 돌아갈 리 없다.
이러다간 제2의 IMF는 가능성이 아니라 필연일 수밖에 없다.
이제라도 나라 살리기에 힘을 모아야 한다. 정쟁이 치열하긴 우리와 다를 바 없지만 위기 앞에선 하나로 똘똘 뭉치는 미국이 새삼 부러워지는 국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