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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배롱나무 전설
[기고] 배롱나무 전설
  • 승인 2008.09.16 19:3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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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오시려는지 하늘빛이 어둡다. 주말의 이른 아침 라디오의 시사프로그램을 들으며 시내 외곽도로를 달리는데 문득 눈길을 잡아끄는 도로변의 꽃나무가 있다. 흐린 날씨 탓에 모든 사물이 색칠이 안 된 스케치처럼 담백한 가운데, 유독 홀로 강렬한 빛깔로 열정을 뿜어내고 있는 것이, 빈센트 반 고흐의 개성 넘치는 붓 터치의 풍경화를 보는 것 같다.

먼 옛날에 어느 어촌 마을에서 멀지 않은 섬에는 머리가 세개나 달린 이무기가 살고 있었는데, 매년 처녀 한명씩을 제물로 바치지 않으면 마을사람들에게 큰 해를 끼쳤다.

어느 해 제물로 선정된 아름다운 처녀가 있었고, 그 처녀를 연모하는 마을 총각이 사랑하는 처녀를 위해 이무기와 사투를 벌인 끝에 목 두 개를 자르는데 성공한다.

처녀는 기뻐하며 그의 아내가 될 것을 약속하지만, 총각은 이무기의 나머지 목을 백일 안에 베고 오겠다며 섬으로 향한다. 이무기를 죽이면 흰 깃발을 달고 오마던 총각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며 기다리던 처녀는 백일이 되던 날, 붉은 깃발을 달고 마을 어귀로 들어오는 배를 보게 된다.

이무기의 피로 물들은 깃발을 보고 총각이 죽은 걸로 생각한 처녀는, 슬픔을 견디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거두고 만다. 그 후 처녀가 죽은 자리에 나무가 자라고 붉은 꽃이 피어났는데 그것이 백일 동안 기도를 드린 정성의 꽃, 배롱나무(목백일홍)라 하였다.

사무실에 도착해 인터넷을 검색하니 나무의 정식 명칭은 부처꽃과에 속하는 낙엽교목으로 크게는 5m 정도 자라며, 붉은 빛을 띠는 수피 때문에 나무백일홍, 또는 자미라고 불린다. 이 밖에 백양수(간지럼나무), 원숭이가 떨어지는 나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나무줄기가 매끈해 사람이 가지를 만지면 나무가 간지럼을 타고, 또한 원숭이도 오르기 어려울 정도로 매끄러운 나무라는 뜻이기도 하다. 간지럼 많이 탈 어린 나이에 부끄럼도 많았을 전설속의 슬픈 처녀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배롱나무는 유독 부처님을 모시는 절 마당이나 선비들이 기거하는 곳의 앞마당에 많이 심었다. 배롱나무가 껍질을 다 벗어 버리듯 스님들 또한 세속을 벗어버리길 바라는 마음에서였고, 선비들의 거처 앞에 심는 것은 청렴을 상징하는 때문이라 하는데 아이러니한 것은 똑 같은 이유로 대가 집 안채나 여염집에는 심지 않았다고 한다.

껍질이 없는 나무가 여인의 벗은 몸을 상징한 것 같다나 뭐라나…. 그러나 지금은 정원수나 가로수로도 각광을 받고 있다. 중국이 원산지인 배롱나무가 우리나라에서는 1254년에 쓰여진 ‘보한집’에 자미화’가 언급된 것으로 보아 그 이전부터 심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오래되고 눈에 띠는 나무이니만큼 전설이나 비유가 많을 법도 하다. 부산 양정동에는 천연기념물 제168호로 지정되어 있는 800년이나 된 배롱나무가 있는데, 그 나무야말로 살아있는 전설이 아닐까 생각되어진다.

‘떠나간 임을 그리워 함’이란 꽃말을 지닌 배롱나무는 지금도 붉은 아픔을 토해내고 있다. 그러나 뜨거운 태양아래서도 열정을 꺾지 않았던 배롱꽃도 이제는 곧 휴식할 시간이 다가와서인지 꽃잎이 많이 떨어져서 마음이 짠하다. 아침저녁으로는 가을바람이 제법 쌀쌀하고 하늘은 어느새 높이 달아나 있다. 마음 한 자락이 휑뎅그레해지더니 벌써 가을인가 보다. 그러고 보니 한가위가 가까워지고 있다. 고향 떠나 살고 있던 가족들이 한 자리에 모이면 한가위 대보름달이 뜰 것이다. 은은한 달빛 아래에서 배롱꽃을 볼 수 있도록 그때까지 조금만 견뎌주면 좋겠다. 이기적인 나의 부탁을 들어 줄 수 있는지 오늘은 배롱나무한테 가서 물어 봐야겠다. 그리고 이파리 무성한 나뭇가지를 만지면 간지러워 하는지도 확인해봐야겠다. 그러다가 그만 조금 남은 꽃송이들이 부끄러워서 다 숨어버리면 어떻게 하지…?

공영윤 경남도의회 의원(진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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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롱이 2008-09-17 10:33:39
감수성 많은 의원님이라
도민들의 마음 세세한곳까지
마음써서 일하실거라는 생각이 드네요.
흐믓한 마음으로 잘 읽었습니다.
기대할께요...의원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