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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휴가
잃어버린 휴가
  • 승인 2008.07.2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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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얼마 전 유행했던 한 카드사의 광고 카피다. 최근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다. 기상청은 무더운 올 여름, 잠깐의 시원함을 선물할 비를 예고했지만 이글그리는 태양이 이마저도 증발시켜버렸는지 비도 오지 않는다.

이번주부터 본격적인 하계 휴가 기간이다. 하지만 국제유가의 고공행진, 원자재값 폭등, 살아날 줄 모르고 풀죽어 있는 경기 등의 영향으로 휴가를 기피하는 서민들이 늘고 있다고 한다.

휴가를 즐길 자금이 부족해서, 함께할 연인이 없어서, 일이 밀려 도저히 시간이 나지 않아서….

재충전의 기회인 휴가를 버거워하는 샐러리맨들이 늘어놓는 휴가기피 사유다.

또 주 5일제의 시행은 1년만에 한번 찾아오는 하계휴가 시즌의 가치를 조금은 김 빼놓았다.

주 5일제 이전에 여유로운 시간의 향유는 특별한 것이었으나 이젠 일상적인 것으로 바뀌었다.

휴가 역시 마찬가지다. 이전의 휴가는 온 가족이 손꼽아 기다리면서 준비하는 설렘과 기다림을 동반하는 특별한 일정으로 몇달 전부터 친지들과 일정을 맞추며 1년에 단 한번 뿐인 휴가를 다 같이 즐겁게 보내기 위해 분주했다.

혹, 부족하거나 예상치 못한 불운이 닥쳐도 서로 위로하며 그 즐거움을 쉽사리 팽개치려 하지 않았으니, 이는 이미 수개월을 기다리고 설레어하며 준비한 마음들이 다져져서 작은 실수, 작은 불행은 쉽게 극복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얻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일상적인 휴가는 설렘과 기다림을 우리에게서 앗아갔다.

‘풍요는 차별을 낳고 차별은 새로운 결핍을 낳는다’는 자본주의의 구조는 시간에 있어서도 그 효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주 5일제 등으로 훨씬 여유로워진 시간에도 불구하고 시간에 쫓기는 군상들을 풍자한 30여년 전의 ‘모모’가 베스트셀러 1위를 차지하고, 심해진 부모의 간섭을 못 참아 하는 자녀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집에서 빈둥대는 남편을 보기 싫어 하는 아내들이 급증하고 있다.

함께 해서 좋은 것은 함께 하는 시간이 부족할 때이며, 꿈꾸는 것이 가능한 것은 그 꿈을 현실에서 이루기 힘들기 때문이다.

상품의 풍요에 이어 시간의 풍요는 피할 수 없는 현실로 자리잡고 있다.

지나친 기술개발과 정보화는 인간의 노동을 기계에 의해 빠르게 대체시킨다.

시간의 풍요를 재앙이 아니라 희망으로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욕망에 제동을 걸고 일상을 묵묵히 걸어가는 느림의 지혜가 필요하다.

한번 잃어버린 것은 쉽게 되찾을 수 없으며 억지로 되찾아도 그 의미가 온전히 보존된 채 되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잃어버린 휴가는 쉽게 되찾을 수 없다.

현실이 어렵다 해도 이번 하계 휴가는 마음껏 즐기는 여유를 한번 가져보자. 휴가를 즐길 자금이 조금 부족하면 어떤가. 여유를 찾고 재충전해 보다 낳은 미래를 모두 함께 만들어 보자.

허균 사회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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